[미디어스] 삭발과 장외투쟁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게 그간 보수언론의 충정어린 조언이었다. 그런 주장을 받아들인 것일까?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민부론’을 주장하는 자리를 만들어 무대에 올랐다.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스티브 잡스’처럼 최근 유행하는 무선 헤드셋 마이크를 끼고 청바지를 입은 채였다. 황교안 대표 뒤편에 비친 프리젠테이션의 디자인은 구태한 수준 그대로지만 어쨌든 뭔가 어울리지 않는 노력을 하는 모습이 짠해 보이는 면도 있다.

아무튼 황교안 대표가 들고 나온 ‘민부론’이란 이름은 ‘국부론’의 변형으로 보인다. ‘국부론’은 애덤 스미스가 1776년에 내놓은 저서로 원제는 ‘국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이다. 즉, 국부(國富)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밝히고 이를 증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논한 책이다. 자유무역을 촉진하고 시장의 자기조절을 신뢰하면 된다는 게 결론이다. 당시 수준에서는 혁신적인 주장이었지만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기엔 물론 무리가 있다.

이에 비추어볼 때 ‘민부론’이란 시장원리를 강조하는 ‘국부론’의 핵심 아이디어를 ‘국가’가 아닌 ‘민간’의 부 증대에 맞춰 강조하겠다는 작명으로 볼 수 있다. 이 작명에서 이미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가 전부 드러난다. 실제 황교안 대표의 발표 내용은 법인세 인하와 규제 완화, 노동시장 유연성 확대 등의 전형적인 우파적 주장으로 채워졌다. “잘사는 국민 하나, 열 나라 안 부럽다!”라는, ‘국민’과 ‘나라(國)’를 동위에 놓고 비교하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구호도 등장했다.

실패한 과거 정부의 해법을 그대로 답습한 수준에 그친 것은 어떤 불성실로 보인다. 정책을 새로 제시하거나 이를 알리는 것에 무게를 싣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보다는 정치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게 주된 목적으로 보인다. 굳이 민간과 국가를 대립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정권에 대한 보수세력의 공격 논리는 단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아마추어인 운동권 출신들이 번지르르한 대의를 내세우며 사회주의적 정책을 급진적으로 추진하지만, 이는 자기들끼리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거짓 명분에 불과하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정권이 특히 남북관계 개선에 힘을 쏟고 있는 것에도 이게 반영돼있다. 이 정권과 북한 및 중국은 비효율적 전체주의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대외정책에서는 한미동맹으로부터의 탈출과 친북적 논리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2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민부론' 발간 국민보고대회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이런 주장의 새로운 버전은 ‘386 세대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을 고리로 정치적 유대감을 유지하고 있는 386세대가 정치와 경제 양쪽에서 기득권을 장악하고 한정된 자원을 자기들에 유리한 방식으로 배분하고 있어 이후 세대에게 고통을 안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다소간의 과장이 포함돼있는 경우도 있지만 전적인 거짓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를 묻는다면 주장의 본질이 드러난다. ‘386의 나라’를 창간기획으로 내놓은 중앙일보의 경우 386세대가 젊은 시절엔 3저호황과 외환위기의 혜택을 봤고 은퇴를 앞두고는 정년연장의 수혜를 입게 됐다며 “386 세대는 취업부터 퇴직까지 걱정없는 유일한 세대가 되겠지만, 그만큼 청년 세대의 신규 일자리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정년연장이 신규채용에 악영향을 준다는 논리는 보수세력의 단골 레파토리이다. 이미 임금피크제 도입 때도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직까지 명확한 근거는 없는 얘기다. 고령 노동자의 인건비를 줄인 만큼 기업이 신규채용에 적극적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이 반대의 경우라고 볼 수 있는 정년연장도 마찬가지다. 삼성 사장 출신이고 박근혜 정권에서 인사혁신처장을 지낸 이근면 씨도 청년실업과 정년연장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거친 비유를 하자면 반찬에 들어갈 비용을 늘리기 위해 쌀 사는 돈을 아끼진 않는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고용관계에 있어서 고령층 노동자와 청년 노동자를 대립관계로 놓는 주장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는 기업의 인건비 부담 경감을 주장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것은 ‘386세대론’과 ‘우파적 전환’의 연결고리 중 하나일 뿐이다. 어떤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386세대’에 대한 인적청산이 필요하다는 수준의 주장을 내놓지만 ‘386세대’가 모두 동일한 고용관계로 묶여 있지 않는 이상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노동유연화를 더 큰 폭으로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다만 이 문제와는 별개로 연공급제 등 임금구조 개편이나 기업 조직문화의 변화, 연금개혁과 같은 논의는 필요하다. 노동과 자본의 이해가 함께 걸려있는 만큼 이를 풀기 위해선 ‘사회적 대화와 합의’라는 정치적 틀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 이 정권에선 어렵다. 다들 노동운동 세력을 탓하지만 공공기관의 효율성 강화를 내세우며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화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않는 이 정권의 태도를 보면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다 똑같다”는 얘길 함부로 하고 싶지 않지만 가끔은 그게 진실인 경우도 있다. ‘386세대’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부를 해체하자는 것은 능력을 제대로 평가 받을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자는 거다. 386세대는 그 자신들이 산업화 세대로부터 배운대로 기득권을 그 자식들에게 이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데, 이걸 못하게 하면 이제 젊은 세대는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최상층 기득권은 애초에 이 레이스 자체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극빈층은 정반대의 이유로 경기 참여를 아예 포기한 지 오래다. 사실상 자해에 가까운 이 레이스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잘 키운 국민 하나”를 외치는 ‘민부론’이나 이와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국부론’이나 똑같은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상유지와 퇴행이라는 두 선택지만을 강요하는 현실정치의 민낯이다. ‘민부론’이 아니라 자해적 레이스 자체를 거부하는 ‘진보’가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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