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새로운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고 원내에서의 추가 갈등을 예고하는 상황이지만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이 예상대로 이뤄지면서 ‘조국 대전’은 일단 마무리됐다. 이 시점에서 이 사태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론은 20대의 ‘세대적 박탈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조국 장관에게 제기된 의혹이 앞에서는 사회 정의를 말하면서 뒤에서는 편법을 활용해 자기 이익을 챙기는 ‘86세대’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회 정의’를 말한 것조차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뿐이었다는 해석이다.

이런 관점은 암호화폐 투자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똑같이 등장했다. 기성세대가 경기가 좋던 시절 부동산과 주식투자로 돈을 벌었으면서 젊은 세대의 암호화폐 투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가로막는 ‘사다리 걷어차기’를 했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의 반응을 봐도 86세대나 그보다 윗세대인 ‘베이비 부머’들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확인된다.

한국의 정치담론에서 ‘386’이란 표현은 처음엔 특정한 성격을 가진 정치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했다. 1990년대 말 명문대 출신 정치지망생들이 학생운동 경력을 징검다리로 해 ‘젊은 피 수혈’이란 명분으로 기성 정치권에 발을 들이면서 만들어진 말이다. 정권이 교체되고 이들이 사회의 주류가 되면서 ‘386’은 ‘486’, ‘586’이 됐고 세대론을 말하기 좋아하는 주류 언론에 의해 그 세대의 대표격으로 호명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으로는 사회진보를 말하면서 뒤로는 그마저도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자’란 규정을 이 세대의 세대상으로 삼는 세태가 뭘 의미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86세대’라더라도 학생운동 경력을 자신의 핵심 정체성으로 여기지 않고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사회정의와 진보를 외치며 민주화를 이끌었다지만 그것도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엘리트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의 ‘86세대’에 대한 분노는 특정한 정치집단의 문제와 ‘비키지 않는 똥차’라는 기성세대에 대한 일반적 반감이 뒤섞여있다고 볼 수 있다. 즉, ‘386론’이란 결과적으로 어떤 정치 혹은 그 정치가 만들어 낸 대립구도에 대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 ‘정치’란 자유주의 정치와 ‘침묵하는 다수’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대결구도에서 나타난 것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11일 오전 경기도 정부과천청사로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86세대’의 문제가 ‘내로남불’과 ‘위선’이라는 개인적 태도의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에서도 이런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정치 노선의 대립을 개인적 태도로 치환하는 것은 현실정치의 고전적 코드로 모든 시대, 모든 형식의 정치에서 어떤 형태로든 등장한다. 거짓말과 배신, 충성심이나 신실성의 부족 등은 정치의 역사에서 숙청과 배제의 키워드로 반복 등장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게 정치 논리의 일반형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근대 사회에 들어서라고 볼 수 있다. 이 계기는 크게 두 가지 일텐데, 첫째는 자유주의 정치의 주류화이고 둘째는 민주주의의 확대이다. 특히 보통선거가 민주주의의 원칙이 되고 ‘네거티브 캠페인’이 활성화되면서 ‘내로남불’과 ‘위선’의 코드는 대중적 위력을 갖게 됐다. 정치노선을 논박하는 것보다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에 훨씬 유용했기 때문이다. 가치와 당위를 말하는 정치가 이 논리의 주요 먹잇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터넷, 특히 SNS의 등장은 ‘내로남불’과 ‘위선’을 앞세운 비판에 더 큰 위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 같다. 편리한 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론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해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실제 어떤 측면에서 인터넷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기능하는 공론장으로서의 인터넷이 아니다.

SNS시대의 개인은 마치 표를 호소하는 정치인이나 상품을 판매하는 상인, 혹은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처럼 ‘친구 추가’와 ‘팔로잉’을 통한 ‘관심’의 획득, 또는 ‘구독’과 ‘좋아요’를 통한 구체적 이익의 실현을 기대하며 말하고 행동한다. 이 결과 SNS 이용자들은 주장이나 행위의 결과와 이해득실을 연관짓는 논리를 학습하고 경쟁의 원리를 내면화 한다. ‘잘못’은 집단적인 불매투쟁으로 이어진다. 사과와 반성, 자숙, 입장 표명은 이제 ‘오피니언 리더’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숙명이 되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틀을 통해 정치를 이해하고 소비한다. 세상사의 근본은 결국 이해득실이며, 따라서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남을 더 잘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능력’이다.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는 SNS라는 정글에서 개인화 된 정치의 약육강식 논리로 활용된다. 그러나 이의 결말은 체계적 지식을 갖추고 자기 주장을 조리있게 표현하며 세상사를 잘 알고 계산에 능한 준-엘리트들이 담론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SNS 상의 담론은 기울어진 면이 있다. 신문지상에서 86세대의 위선이나 젊은 세대의 박탈감을 논하는 사람들이 종종 ‘타임라인’을 언급하는 것도 이를 반영하는 표지다. 앞뒤가 어쨌든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하고 있으므로 언론과 정치는 SNS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담론을 부지런히 다루는 것으로 자기 소임을 더 성실히 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결과적으로는 엘리트 정치의 강화로 이어질 뿐이다. 서구에서 대중지가 처음 위력을 발휘한 19세기 선거에서 등장했던 바로 그 구도가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SNS에서 더 심화된 형태로 반복될 뿐인 것이다.

이 모든 배경에는 세상을 설계하고 생산할 권한을 엘리트가 독점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오직 반대할 권리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맹점이 숨어있다. 우리가 SNS 애호가들에게 사실상 쟁점에 대한 판단을 위임하고 ‘좋아요’와 ‘공유’로 시민의 의무를 다한 것인양 행동하는 것은 엘리트 정치인과 유권자의 관계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정치적 선택이 담론의 소비로, 정치가 팬덤으로 대체되는 현상이다. 사실상 정치적 불매투쟁이었던 촛불시위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도 이런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반대할 권리 뿐만 아니라 세상을 직접 설계하고 만드는 권한을 보장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86세대’의 문제는 ‘내로남불’이니 ‘위선’이니 하며 어떤 젊은이들의 반감이라는 포장지로 소비하고 말 일이 아니다. 여느 정치가 그렇듯 이 역시 노선과 주체의 문제이다. 젊은 세대를 포함해 현실 정치에서 배제돼있는 계층의 구성원을 모두 현실정치의 영역으로 데려와야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다. ‘86세대’와 ‘20대의 상대적 박탈감’을 말하는 논자들은 많지만, 지금 그런 정치를 모색하는 집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하는 게 필요한 시점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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