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블록버스터같은 나날이다. 멀쩡한 군함이 침몰하고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지고 전국에 수백만 마리의 가축들이 생매장되던 게 최근까지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거기에 지난주엔 헐리우드 액션 영화를 방불케하는 인질 구출 작전이 감행되었다. 친절한 군대의 협조로 메이킹필름(시연장면), 본작방영(당시 영상), 게다가 코멘터리(해설방송)까지 이어졌으니 그 자체로 의미가 깊은 상영회였다. 모든 언론에서 우리 특공대의 진입장면에 환호하고 열광할 때 정작 두 가지 질문이 빠져 있었다. 왜 우리나라의 배가 그곳에 있었을까. 그리고 21세기에 왠 해적의 출몰일까.

▲ 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해안을 갖고 있는 소말리아는 '아프리카의 뿔(Horn of Africa)’로 불린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기 위해 소말리아에서 군비 경쟁을 벌였다.
해적의 출현에 대해서 보자면, ‘해적' 대신에 그냥 산적이라고 해도 될 것 같고 화적떼라고 해도 될 것 같은 무감각인 셈인데, 잘 생각해보면 그냥 하늘에서 해적들이 떨어졌을 리 없고 우리가 미처 신경을 쓰지 않았던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해적이란 존재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주경철 교수의 <문명과 바다>(산처럼, 2009)를 보면, 해적은 육상권력의 반권력으로 태어났고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이 책은 해적에 대한 책이 아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근대의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는 정주 농경문화권 중심의 역사다(11쪽). 언제나 땅이 우선이었고 보이지도 않는 땅의 경계로 세계의 역사가 서술되었다. 하지만 이를 바다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측면이 보인다. 이를 테면 해상권력이 육상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초가 되었던 절대왕정의 시기, 그리고 해외의 수탈을 통한 본원적 축적을 가져온 초기 자본주의 시대 모두 바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이 책의 3장 제목은 ’근대세계의 이면, 선원과 해적의 세계'다. 재미있는 것은 선원과 해적의 세계가 ’근대세계의 이면'이라는 표현이다. 근대세계를 가능하게 했던 해상활동이 오히려 근대세계의 이면이라니 말이다.

유럽의 열강들이 서로 해상권력을 차지하려고 할 때 해적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해상권력을 지키는 수단이 되었고 더구나 상대국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공인받은 세력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당시의 해적은 대상인들의 주요한 투자처 중에 하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상보험업을 유지시키는 필요악이기도 했다. 따라서 ”16~17세기까지도 영국 귀족들은 상업을 천시하는 심성을 지니고 있어서 전적으로 상업활동만 하는 데에는 투자를 꺼렸다. 해적 행위는 한편으로는 조국의 영광을 드높이면서 동시에 자신은 부자가 되는 훌륭한 행위로 찬양됐다.”(172쪽)

하지만 근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던 당대의 선원들은 선장에 화물주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선상규율에 벗어나고자 했고, 이들의 탈출구에는 해적이 되는 것도 포함되었다. 당시 선원이 된다는 것은 육상의 감옥보다 더욱 나쁜 환경에서 산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선원들은 시골을 떠나온 사람들을 반강제로 납치하는 ’영혼장사꾼'들에 의해 거래되었다. (151쪽) 영국의 유명한 동인도회사는 사실 이렇게 노예화된 선원들에 의해 유지된 화려한 우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해적이 되기로 한 이들은 기존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질서를 만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은 선장에게 집중되어있던 권력을 분산했고 노획물에 대한 분배는 ’일한 만큼 분배'되었으며, 상해를 입거나 죽은 자의 부인을 위한 보험제도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중대한 결정은 선원총회에서 결정되었다. 그래서 ”해적들은 가장 비도덕적인 생활을 할 것 같지만 적어도 그들 내부적으로는 ’도덕경제'를 좇았고 이를 ’민주적'으로 실천했다.”(179쪽) 즉 앞서 말했듯이 해적은 그 존재에서부터 육상권력의 반권력으로 존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문명과 바다>의 저자는 근대세계를 있게 했던 해상활동 자체가 동시에 근대세계의 이면이었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 국내 언론이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로 묘사하고 있는 소말리아 해적의 위풍당당(!)한 모습. 그들의 해적선은 우리가 상상하는 규모가 아닌 조각배에 모터를 단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우리에게 급속하게 친숙해진 소말리아 해적을 보자.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소말리아 해적은 소위 UN을 필두로 하는 개입주의적 국제전략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로 보인다. 비교하자면 UN이나 미국의 소위 ’인도주의적 개입'으로 산악 게릴라를 만들었던 이라크의 사례와 유사하다고 할까.

소말리아는 1991년 독재체제가 붕괴하고 나서 내전상태로 접어든다. 1992년 평화유지군이 투입되고 3년만인 1995년 철수한다. 이 과정에서 소말리아 군부의 수장을 제거하려는 무모한 공격 끝에 미군 18명이 사망하고 84명이 부상당한 블랙호크다운 사건이 있었다(영화화된 그 사건이다). 그리고 2004년 케냐에서 과도정부가 만들어지고 이듬해인 2005년에 귀국하지만, 소말리아 내 이슬람 세력의 연합체인 이슬람법정연대가 구성되면서 실질적인 집행력을 장악했다. 이에 인근 이디오피아와 평화유지군 등이 소말리아를 침공하여 이슬람법정연대를 무력화시킨 것이 2006년의 일이다. 바로 2006년 소말리아 침공을 통해서 자신들에 친화적인 과도정부를 세우려는 미국과 이디오피아의 욕심이 현재의 소말리아 내전을 지난하게 만드는 원인인 셈이다. 그런데 왠 걸, 2008년 UN은 소말리아 해적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2009년 3월 우리 정부도 소말리아에 청해부대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소말리아 연근해는 서구의 폐기물을 불법 투기하는 바다 쓰레기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소말리아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병을 앓는다. 지금까지 소말리아 앞바다에 버려지는 폐기물에는 방사능폐기물도 포함되어 있어, 실제로 심각한 국제문제로 비화된 바도 있다. 또한 영세어업으로 먹고 살던 소말리아 어민들에겐 한국을 포함한 대규모의 원양어선은 생계를 위협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결국 자경단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장기화된 내전의 결과로 해적화되었다. 물론 모든 해적이 이런 경로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말리아 해적'처럼 자국 영해에서 활동하는 해적이라니, 정말 이상한 표현 아닌가. 그렇다면 그곳에 고기를 잡고 폐기물을 버리는 그 배들은 누구의 허락을 받고 들어온 것인가.

역사책을 뒤져보면 우리 역사의 왜구만큼이나 신라인들로 구성된 ’신라구’가 일본을 꽤나 괴롭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우린 이를 왜구의 비중만큼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소말리아 해적이 소말리아 여성들에게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희화화'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한 우익 인사의 솔직함에 비하면 얼마나 가식적이고 역겨운가. 어쩌면 소말리아의 해적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한국을 포함한 외세에 의해 간섭받는 소말리아의 현실이 빚어낸 이면이 아닐까. 소말리아 해적 사건은 주경철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세계의 이면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사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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