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는 '택시운전수, 살인자, 조선족, 황해'의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화 속의 모든 이야기는 하정우가 연기한 실질적인 주인공 '구남'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살아가는 구남은 빚에 시달리다 못해 살인청부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으로 건너와 자신의 목표물을 뒤쫓는데, 예상할 수 있다시피 여기서부터 일이 꼬입니다. 이로 인해 구남은 쫓기는 신세가 되고 그를 쫓는 사람들이 이야기에 가세하면서 그의 운명은 뿌연 안개로 뒤덮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일단 오락적인 면에서 <황해>는 나홍진 감독과 동일한 두 배우의 전작 <추격자>에 미치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 <추격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스릴러의 걸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를 극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첫 관람 이후에 케이블 채널을 통해 두 번, 세 번 관람하게 되면서입니다. 보면 볼수록 외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적인 면, 즉 내러티브에 있어서의 디테일이 굉장히 꼼꼼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죠.

<추격자>는 일반적인 스릴러와 달리 범인을 이른 시간에 잡아들였습니다. '일반적'이라고 함은 상당수의 스릴러 영화가 주인공이 범인을 쫓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쪽이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수월합니다. 보통 스릴러는 '범인을 잡으면서 끝난다'라는 고정관념이 박혀있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하지만 <추격자>는 범인을 잡은 후에서야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도록 배치했습니다. 그럼에도 전자의 스릴러 영화를 훨씬 웃도는 긴장감을 선사해줬습니다.

이런 영화를 이끌고 있던 것은 결국 아주 사사로운 또는 인간적인 감정이었습니다. 전직 비리경찰에다 여전히 비인간적인 일을 일삼던 중호는 단지 자신이 관리하던 아가씨를 찾기 위해 사건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미진의 딸을 보며 점점 인간미를 되찾게 되고,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희생을 스스로 감수하며 범인검거에 기를 쓰고 달려듭니다.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하던 여자에게 몸을 팔러 나가라며 독촉하던 냉혈한이 말입니다.

<황해> 역시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구남이 살인청부를 위해 한국행을 결심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빚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으로 일을 하러 떠났다가 돌아오기는커녕 연락조차 닿지 않는 아내입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여 목표물을 감시하는 한편으로 아내를 찾고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감정이입의 요소가 <추격자>의 그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2시간 40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이 부족해 보입니다. 1, 2장만 해도 구성과 연출에 있어서 딱히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하나, 절정에 해당하는 3장에 이르러 이야기의 중심이 다른 인물들로 옮겨가면서 구심점이 흐트러집니다. 다행히 점점 후반으로 갈수록 예의 완급조절능력을 선보이며 다시 원상복구시키지만 자칫 지루함을 느낄 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영화의 개봉일이 미뤄지고 최근까지 후반작업을 계속했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편집이 툭툭 끊긴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황해>가 러닝타임의 제약을 받은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

결정적으로 <추격자>에 비해 <황해>는 사건과 관련하여 보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등장인물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관객에게 충분히 전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적당한 비중을 할애하지 못한 것이 결말부에 드러나면서 불친절하게 보입니다. 영화가 끝나자 옆에 있는 관객들이 "너 저게 무슨 얘긴지 이해했어?"라며 어리둥절해하는 것을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단점을 쭉 나열했지만 <황해>의 만듦새는 예상했던 것에 비해 뛰어납니다. 이 영화를 오락영화로 보느냐, 아니냐의 관점에서 나눈다면 위의 것들이 약점으로 작용할 겁니다. 이야기를 쫓아가기도 힘들지, 이해하기는 더 힘들지, 감정이입도 부족하지, 그렇다고 <추격자>처럼 어떤 희열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지, 심지어 시종일관 침울하지, 잔인하지. 관객들이 널리 환영할 만한 영화가 아닙니다. 이에 더해 의도적으로 흐름을 깨지 않고자 유머감각도 꽤 줄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청소년 관람불가에 긴 러닝타임까지 얹으면, <황해>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되진 않습니다. 상업성과 작품성이 반비례하는 것은 어색한 일도 아니죠. 말장난이 아니라 이상의 지적은 기대작이었던 만큼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탓, 혹은 오락영화의 기준에서 논한 것이라고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2시간 40분 동안 비교적 큰 공백 없이 이끌어온 것 자체가 훌륭합니다. 대체적으로 지루할 틈이 거의 없어요. 혹자는 나홍진 감독을 화려한 테크니션이라고 부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저는 능숙한 스토리 텔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추격자>도 그랬지만 <황해>도 완급조절에 있어서는 최선을 보여줍니다.

침울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가 피바다를 동반한 하드보일드와 만난 것은 <황해>의 가장 큰 단점이자 장점입니다. 감상주의와의 거리가 좀 더 멀어졌다는 점에서는 <황해>가 <추격자>보다 오히려 높은 완성도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오락영화가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보자면 <황해>도 <추격자>에 못지않습니다. 다만 역시 흥행에 있어서는 낙관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울러 앞서 지적한 바들이 러닝타임의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많이 남습니다. 물론 주어진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우겨 넣는 것도 감독에게 필요한 능력 중 하나겠지만 말입니다.

후반부에 부두를 빠져나오는 트레일러로 시작한 자동차 추격전은 <황해>의 백미입니다. 구남과 면가가 각자 차를 몰고 가며 치고 박는 것 외에도 트레일러로 보여주는 장면은 기가 막히더군요. 도대체 이때 몇 대의 카메라를 썼는지, 몇 번의 테이크로 완성한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외적인 완성도는 여전히 훌륭한데 내적인 완성도에서 몇몇 틈이 보인다는 것은 심히 유감입니다. 시나리오를 조금만 더 간결하게 축약했다면 어땠을까 합니다.

제가 본 <황해>는 2시간 40분 동안 이어지는 구남을 위한 장송곡이었습니다. 돈에 의해 가족이 갈라지고, 돈에 의해 살인을 저질러야 할 판국에 놓이고, 그 돈 뒤에는 또 다른 인간의 욕망이 있었습니다. 구남은 그런 타락한 인간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는 처지였습니다. 개병에 걸려 죽은 개의 시체까지 파내 먹어치우는 인간들에게...

- 결말 정리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에 따라 내린 결론입니다. 우선 김승현, 즉 구남이 죽이려던 남자는 동시에 두 명의 상대로부터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습니다. 한 명은 김태원이고 다른 한 명은 마지막 장면의 은행에서 근무하던 김정환입니다.

김태원은 면가에 의해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까지 갔을 때 구남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잣말을 계속합니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아 딱 한 마디만 들었는데, "그 새끼가 내 여자를 건드렸어. 내 집에서"라고 하더군요. 이걸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김승현은 김태원의 내연녀 - 분당에 살던 -와 몰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김태원이 김승현의 기사를 통해 그를 죽이도록 청부합니다. 기사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의뢰를 했는데, 그 사람이 구남이라고 김태원이 오해를 한 것이죠. 그래서 구남이 잡히면 자신이 살인을 청부한 게 발각될까 봐 그를 죽이라고 부하들에게 명합니다. 다들 보셨겠지만, 사실은 그 기사가 김승현을 죽이도록 의뢰했던 남자 두 명은 일찌감치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김정환은 김승현의 부인과 내통하던 사이로 보입니다. 워낙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극 중에 드러난 바가 없지만 이것 외에는 달리 연결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런 관계에 있던 김정환은 술을 마시면 늘 웨이터에게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이것은 나중에 이 웨이터가 김태원에게 잡혔을 때 다 불었던 내용입니다) 이 조선족 웨이터는 김정환에게 조선족에게 의뢰하면 청부살인을 할 수 있다고 귀띔하고, 그래서 한국에 온 사람이 바로 구남입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김정환과 김태원 모두 치정에 의해서 김승현을 죽이고 싶어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하여간 남자들의 이 어긋난 욕망이란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자고로 여자는 요물이라고 했거늘... (농담인 거 아시죠?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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