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참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진정한 팔색조이며 또한 판도라의 상자일 것이다. 짧은 가수 생활치고는 많은(?) 히트곡을 남긴 이장희가 굳이 그의 이름 뒤에 꼭 따라붙어왔던 것이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자 한 그 순간에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좀 의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떨떠름함은 이내 사라지고 다소 투박한 기타 반주에 부른 그의 노래 ‘내 나이 예순하고 하나일 때’에 이내 빠져들고 말았을 것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유달리 가슴을 파고드는 노래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대중성이 높은 노래는 아마도 김광석이 부른 ‘서른즈음에’일 것이다. 그리고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살에는’ 그리고 그 후의 노래로는 김목경의 노래를 김광석이 콘서트에서 불러 많은 사람들을 울린 ‘어느 늙은 노부부의 이야기’가 있다. 하나같이 듣자면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그 노래들을 듣고, 부르고 혼자 청승 떨기에 좋은 노래들이다.
그렇게 감성을 송곳처럼 파고드는 노래들이 있지만 이제 그 목록에 잘 몰랐던 한 노래 이장희의 ‘내 나이 예순하고 하나일 때’를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아직은 대부분 그 나이가 되기 멀었다고 생각하고 살겠지만 누구나 그 나이가 되고 마는 인생 육십의 노래를 미리 부른 것이 참 독특하다. 앞서의 노래들이 모두 그 나이를 경험하고 부른 노래라면 이장희의 노래는 86년에 내놓았으니 육십이 되기 삼십년쯤 전에 만든 노래인 것이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의 노래가 가슴에 맨살에 닿는 촉감으로 다가선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노래는 멜로디도 대단히 단조롭고 가사도 일정한 틀에서 아주 조금씩만 달라질 뿐이다. 특별한 꾸밈음도 없고, 가창력을 뽐낼 고음역 파트도 없다. 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고음이라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노래에 솜에 물 스미듯이 그의 노래가 가슴을 적신 이유는 그의 삶이 진실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노래가 없던 적이 없고 특히나 선사시대부터 가무를 즐겼다는 우리 민족이기에 더욱 노래는 생활에서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음반시장은 십분의 일로 줄었다지만 오히려 노래 소비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 더 많다. 수많은 유흥업소와 노래방의 네온간판은 거리를 온통 휘감고 있다. 그러나 그 노래들 대부분은 즐거운 노래들이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가스펠의 가사가 종교를 떠나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듯이 즐거움은 행복의 필수요건인데 노래가 즐거우면 그만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방송을 본 많은 사람들이 21세기의 기인 이장희의 삶에 대해서 부럽고 또 흠모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의 노래는 그의 삶에 대한 일종의 결론처럼 꺼내질 것 같다. 돌아보기도 멀리 보기도 힘든 서른이라는 나이에 삼십년 후를 그린 그의 노래는 인생을 담은 노래이다. 아니 인생을 담고 싶고,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어떤 가수의 제대로 된 자서전이자 미래 일기가 아니었을까?
누구나 가수였다면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는 것이 당연하고 보는 사람 역시 그것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가 적지 않은 히트곡 대신 낯선 노래를 부른 이유는 말 대신 그 노래에 전하고자 하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장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토크쇼 출연은 옛 스타를 만나는 반가움 혹은 추억 이전에 그의 삶, 노래가 주는 감동이 무엇보다 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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