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섬 출신이거든 아무라도 붙잡고 물어보라. 필시 그의 가족 중 한 사람이 그 북새통에 죽었다고 말하리라”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중의 한 대목이다. 지금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 제주에서 벌어진 끔찍하고 참혹한 학살의 역사를 증언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슬픈 역사를 드러내지 못하고 꼭꼭 숨겨야 했던 제주라서, 어떤 오름에 서더라도 슬픈 시 혹은 슬픈 노래 한 자락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 시대의 아픈 사람, 특히 여성을 찾아다니는 KBS <거리의 만찬>이 2주 연속으로 제주 4·3의 생존자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북촌리학살’의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1949년 1월 17일, 군인들은 마을에 들이닥쳐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북촌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KBS 1TV <거리의 만찬>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1부

그렇게 끌려나온 1,000여명의 주민들은 무차별 사격에 쓰러졌다. 그날을 증언하는 생존자 고완순 할머니는 “하나씩 하나씩 머리가 사라졌다”고 표현했다. 학살터였던 옴탕밭은 진갈색 흙이 피에 물들어 까맣게 변했다. 당시 3살이었던 고완순 할머니의 동생은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 소총 개머리판에 두 번을 맞았다. 당시 학살은 면했지만 머리에 물이 찬 채 2년을 누워 지내다 짧은 삶을 거둬야 했다. 아홉 살 소녀가 간직하기에는 너무도 잔혹하고 슬픈 기억이다.

또 어떤 마을에서는 총이 아닌 죽창으로 사람들을 찔러댔다. 사람들이 숨을 거두기 전에 토벌대는 신음하는 주민들 위로 거적을 덮고 그 위에 불을 질렀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11살 소년이 목숨을 부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창에 수차례 찔린 소년은 엉덩이에 살이 없었다. 먹을 것도 없는 동굴에 약이 있을 턱이 없다. 소년의 상처는 피와 상처 그대로 말라갔다. 소년은 눈을 뜬 채로 잠을 청했다. 극한의 공포가 소년을 눈을 뜬 채로 잠들게 한 것이다.

그런 무차별 학살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제주 도처에 널린 굴 덕분이었다. 우리가 제주에 놀러가서 구경하고 오는 그런 널찍한 굴이 아니다. 제주도민을 학살로부터 구해낸 굴들은 입구가 너무 좁아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수색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굴 안은 당연히 어두웠다. 제주 다크투어 백가윤 대표와 함께 <거리의 만찬> 이지혜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좁고 어두운 동굴이었다.

KBS 1TV <거리의 만찬>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1부

아직 공식명칭이 정해지지 않은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민간인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어 이후 7년 7개월 동안 진행된 매우 특이한 경우다. 학살도 무섭지만 그 긴 시간 동안 피해 살아야 했던 제주도민들의 고통은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는 말이 실감이 날 지경이다. 공포와 굶주림을 피해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제주4·3의 이야기를 어디 한번 듣는다고 다 알겠는가. <거리의 만찬>이 2주간 편성을 한 이유는 방송을 보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생존자 할머니들이 <거리의 만찬> 엠씨들에게 말을 하는 모습은 너무도 간절해 보였다. 그나마도 말도 못하고 지내야 했던 세월이 더 길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17일 제주지방법원은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제주4·3 관련 재심 재판을 통해 공소기각을 내렸다. 70년 만에 풀린 억울함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학살 피해자면서도 폭도로 몰린 70년 세월의 원통함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제주4·3을 사(死)·삶이라고 읽는다고 한다. 죽음과 삶을 갈랐던 잔인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들이 7년 7개월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끔찍하다. <거리의 만찬>과 만난 생존자 할머니·할아버지의 증언은 이제 시작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들어주는 정도다. <거리의 만찬>이 권한 공감과 위로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