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정치에 있어서 우리는 참 불행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정치란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각 주체 간의 갈등 속에서 찾아내는 과정이다. 좋은 정치란 완벽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지금보다 더 나은 해법을 더 쉽게 찾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치적 논쟁이란 그저 말싸움이거나 여론을 기만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도구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최근 여의도의 뜨거운 감자인 환경부 블랙리스트 문제가 그렇다. 김태우 수사관이라는 사람이 ‘폭로’를 한 것에서 출발한 이 문제를 자유한국당이 정쟁의 한복판에 끌어 들이면서 첨예한 대립의 전선이 형성됐고 급기야 20일에는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나섰다. 청와대 대변인의 설명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잘해야 물갈이 정도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업무의 적절성 등을 점검하기 위한 ‘체크리스트’란 표현이 나왔는데, 보수야당들은 이 표현을 ‘내로남불’에 갖다 붙여 “내첵남블이냐”고 비아냥 대고 있다.

청와대 설명대로 이 문제를 과거 정권의 블랙리스트와 비교하는 것은 부당하다. 청와대를 나갔다가 무보수인 다른 직위로 돌아온 탁현민 씨가 이미 설명했듯 과거 정권의 블랙리스트는 민간 영역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국가적 탄압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환경부 산하기관장 등에 대한 표적감찰 등의 문제와 성격이 다르다. 지난 정권에서 블랙리스트 적용 관철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공무원들이 쫓겨난 일이 있었지만 이 역시 ‘늘공’들을 탄압한 것으로 ‘어공’들이 문제가 되는 지금의 사건과 본질이 다르다. 이걸 두고 “그럼 조윤선은 왜 감옥에 갔느냐”고 말하는 어떤 정치인은 사리분별을 못하거나 사건의 실체를 일부러 외면하는 것이다.

물론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를 반드시 과거 정권의 특정한 악행에만 붙여서 사용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번 사건을 뭐라고 부르건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굳이 이 사건에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인지는 한 번 따져봐야 한다. 사실 ‘환경부 블랙리스트’라는 사건이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대선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 물갈이 및 밀어내기, 낙하산 등으로 규정해도 야당이 취하는 공격의 논리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물갈이와 낙하산이 문제다 라고 하면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전 정부 때도 그러지 않았느냐“라고 반론할텐데, 그러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촛불정부는 달라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재반론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또 청와대는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고 할 것이다. 논쟁의 구도 자체가 변하는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사건에 부득불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내로남불’의 구도가 가져오는 정치적 효과를 최대화하고 싶다는 욕망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환경부 블랙리스트’가 문재인 정권에 입히는 타격이 아니라 이전 정권의 행위에 주는 면죄부의 효과이다. 문재인 정권이란 착한 척을 하지만 어차피 ‘나쁜 놈’이므로 애초에 ‘나쁜 놈’이란 규정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는 자신들과 실체적으로 동일하게 평가하자는 것이다. 즉, 이제부터는 어차피 ‘나쁜 놈들’끼리니까 ‘나쁜’은 빼고 말해도 되는 건데 왜 굳이 우리만 나쁜 놈을 만드냐, 억울하다, 적폐청산은 정치보복이다, 이런 얘기다.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오른쪽)이 19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환경부 블랙리스트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제 얘기가 나오면 뭐든지 ‘기승전소득주도성장’으로 끝내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21일 통계청이 공개한 2018년 4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는 일자리와 소득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지난해 이미 한바탕 몸살을 치른 표본 문제가 여전히 논쟁거리이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저소득층의 근로자 외 가구 소득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보수언론은 정부가 몇십조씩 쏟아 부었는데도 전혀 소득주도성장의 효과가 나지 않았으니 역시 일자리를 늘리는 것만이 해답이라며 정책의 전환을 주문하고 있다. 물론 일자리를 늘리는 게 해답이다. 문제는 그걸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있다. 보수세력이 말하고 싶은 것은 기업 활동을 더 자유롭게 하도록 하고 노동자의 힘은 무조건 빼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원래 하던 대로 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에 가깝다.

먼저 사실관계를 따져야 한다. 첫째, 몇십조씩 쏟아 부었다는 그 예산 중에 과거 정권이었다면 편성하지 않았을 항목이 얼마나 있나? 둘째, 지금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을 밀어 붙이고 있다고 평가할만한 정책이 무엇이 있나? 구체적으로 성실하게 따져보면 ‘수사’만 요란했지 실제로 한 건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보수언론도 이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부정할 수 없는 딱 한 가지, 최저임금 인상만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것은 문제의 정책은 거의 시작도 된 바 없으며, 시작도 안 한 정책의 전환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누구나 그것의 ‘부작용’을 인정하는 최저임금 인상은 산입범위 조정으로 일부 무력화됐다. 정부가 최저임금 논의 구조를 바꾸겠다고 했으므로 ‘급격한 인상’은 앞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보수세력이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또 다른 문제로 지적했던 주52시간 노동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라는 ‘사회적 합의’와 함께 반쪽이 됐다. 사회적 대화와 합의는 대기업에 규제완화를 선물로 주자는 의미로 전락한 혁신성장과 함께 ‘들러리’와 ‘답정너’로 귀결되었다.

물론 그렇든 말든 보수세력은 정권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소득주도성장의 부작용’을 말할 것이다. 그래야 “거봐라”라고 하면서 역시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보수정치의 복권(?)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허망한 힘겨루기의 과정에서 소득주도성장이란 실험으로 역설적 피해를 보게 됐다고 보수세력이 주장하는 저소득층의 삶은 공론장에서 지워진 채 지속적으로 악화될 것이다.

개혁을 내세우는 정권이 직면한 문제는 ‘내로남불’ 같은 게 아니라 그 수단이 통계든 뭐든 간에 저소득층의 삶이 실제로 어떤지 파악할 수 없고, 거기에 도달하고 개입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것을 실제로 구할 의지도 거의 버린 상태라는 것이다. 지금 정권은 개혁은 장기적 과제로 미룬채 정권재창출에 집중하는 권력-기계 같은 상태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일 이 정권이 이른바 ‘낙하산’이 필요한 이유를 논공행상이나 밀어내기가 아니라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였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법적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적 지형이란 측면에서 일방적으로 불리한 구석에 몰리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거다. 지난 지방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적폐청산’을 실제 할 수만 있다면 다소의 무리수는 용인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게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었다. 개혁은 없고 각자의 ‘손해’만 남은 지금은 이런 대응을 하기도 어렵다. 글이나 말로 한 마디씩 보태는 사람 입장에선 당분간 이 답답한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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