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언론은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이야기를 주요 소재 중 하나로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이른바 ‘태극기’ 들의 비상식적 언동과 행동으로 난장판이 되었으며, 제1야당이 이런 모습만 계속 노출하면 혁신은 기대하기 어렵고, 결국 다 망하고 말 것이라는 얘기다. 거의 모든 주류 언론이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런 지적에 말 한 마디 보태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이 시점에선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태극기 부대들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일까? 사실 이전의 여러 글을 통해 이들의 심리를 한 마디로 정리한 바가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이들이 당연하다고 여겨 온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으로 다가온 여파이다. 과정이 아니고 결과, 명분이 아니라 효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고 실제로 많은 것을 이에 희생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는데, 갑자기 헌법이니 뭐니를 꼬치꼬치 따져서 대통령을 끌어 내릴 정도의 세상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면서 이것을 인정할 수도 없고 하여 누구 덕에 이 나라가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는 둥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잘못한 게 무엇이냐는 둥 너희들도 똑같이 하면서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는 둥 하는 거다.

그런데 ‘피플파워’ 정부의 오늘을 돌아보면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태극기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그 ‘대한민국’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기대를 갖고 지지했건만 왜 바뀌는 게 없는지 모르겠다”란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그때마다 “원래 그렇다”고 답했다. 정치란 게 원래 다 똑같은 놈들이 하는 거니 애초에 포기했어야 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정치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자유한국당 2·27 전당대회의 대구·경북(TK) 합동연설회가 열린 18일 오후 대구 엑스코 앞 바닥에 대형 태극기가 깔렸다. (연합뉴스)

영화 <관상>을 보면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이런 말을 한다. “소신을 유배보내라 명하셨지요. 성공했더라면 제 목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것입니다. 내가 죽거나 아니면 상대가 죽지요.” 얼굴의 생김새가 운명을 결정한다는 믿음을 소재로 한 오락영화의 이 대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 정치관의 일면을 보여 준다. 이런 믿음은 소수가 독점하는 엘리트 정치의 실체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소수의 기득권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권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근대 이후에 ‘나’와 ‘상대’를 규정하는 방식에는 또다른 전형이 생겼다. 그것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통치를 뒤엎는다는 어떤 신화적 경험이다.

혁명사는 근대 민중이 본 기득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대개 왕과 귀족들은 통치의 비밀을 독점하고 있으면서 파렴치한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인물들이며 무능력하고 오로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열중하는 인물들로 묘사되었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왕정을 타파한 혁명의 순간에는 언제나 이런 기득권을 민중의 힘으로 끌어 내린다는 서사가 등장했다. 그리고 여기서 ‘민중의 힘’이란 세상의 주인임에도 부당하게 억압당해 온 이들이 자기 권리를 되찾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실효성을 갖는 통치 체제로서의 왕정이 거의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이 서사는 모습을 달리해 반복되고 있다. 현대 정치에서 비주류와 주류의 거의 모든 싸움은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싸움이라는 외양을 취한다. 이것이 어느 시기에는 파시즘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나치가 스스로의 인종적 우월성을 강변한 것은 ‘유대인의 음모’라는 피해망상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데 부당하게 권력을 소유한 기득권의 음모가 다른 민족에 대한 지배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태극기와 일베들이 상정하는 구도는 정확히 이와 일치한다. 이들은 스스로가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반복해서 증명하려 한다.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며 굳이 태극기라는 상징을 취하는 게 그렇고, 학벌이나 직업을 인터넷 공간에 ’인증’해 과시하려는 것도 그렇다. 이들이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호남과 여성을 내세우는 민주정부와 종북세력이 음모적으로 사람들을 선동해 권력을 탈취해 기득권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광주 북한군 개입설이나 5.18 유공자 명단 공개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대중주의 정치의 반대편에는 흔히 엘리트주의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실제로 현대정치가 돌아가는 방식은 대중주의와 또 다른 대중주의가 경합한 결과가 무엇이건 간에 엘리트가 언제나 승리하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태극기들이 지지하는 김진태 의원이 뜻밖의 선전을 해 이를 바탕으로 2022년에 대선후보까지 됐다고 쳐보자. 과연 광주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명확한 입장표명 없이 선거전을 치를 수 있을까? 이 시점에 이르면 태극기들은 낙담해 정치를 멀리하다가도 또 때가 되면 다른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할 것이다.

사실은 이게 ‘촛불혁명’ 이후 ‘피플파워’의 지지자들이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겪어야 했던 일이다. ‘개혁’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말을 하거나 ‘내로남불’이라는 둥의 똥물을 뒤집어 쓰고 그저 사라지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결국 칼자루를 휘두르는 것은 어느 정권에서든 승승장구하는 관료-엘리트들이다. 그래서 남은 방법은 그저 원래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이 정해진 운명을 ‘피플파워’ 정부도 거스르지 못하고 있다.

‘촛불혁명’ 때는 무능한 정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를 말하던 사람들이 오늘날엔 국가와 정부의 과도한 개입 때문에 개인의 권리가 침해돼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음란사이트 차단에서 북한과 중국의 전체주의 독재를 꺼내고, 지상파 방송에 대한 일종의 권고를 담은 안내서에 대해선 ‘여자 전두환’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지지한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대중의 변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앞서의 영화 대사를 빌려 오자면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세계 곳곳이 다 그렇다. 미국에서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고 있다. 영국 노동당의 중도적 의원들은 제러미 코빈 대표를 향해 정확히 같은 혐의를 제기하며 탈당을 주장하고 있다. ‘유대인은 기득권’이라는 믿음과, ‘유대인은 기득권이라고 믿는 파시스트’라는 규정과, ‘상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해 반사이익을 얻는 정치’라는 비난이 서로를 기득권으로 규정하며 정신없이 교차하고 있다.

이런 악순환에서 탈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결국 정치 그 자체를 바꾸는 어려운 일에 도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게 결론이다. 사건의 주변을 그저 떠돌기만 하는 말장난들과 일회적 가치판단에 열중하는 걸로는 안 된다. 사건의 핵심을 짚고 잠복돼 있는 실제 갈등의 구도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게 첫 걸음이다. 대안을 자처하는 정치와 언론이 이 역할을 해야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태극기들의 시대는 당분간 여러 모습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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