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팬들의 목마름 끝에 인디 록 밴드 ‘검정치마’의 새 앨범 ‘THIRSTY’가 공개됐다. 검정치마는 풍부한 사운드 메이킹, 예민한 촉수로 포착한 언어들을 섬세하게 배치한 가사로 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밴드다. 하지만 이번 앨범을 두고서는 여성혐오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검정치마 음악은 ‘자조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습하고 곰팡내 나는 존재의 이면들 역시 우리의 일부임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이해타산과 거짓이 난무하는 어른의 세계(<이별노래>, ‘배신으로 물든 갑판 닦아줄 수 있는 믿을 만한 선원 하나 없이 홀로 물을 가르네’), 순수예술에서 멀어진 상업예술의 세계(<아침식사> ‘언제나 알 수 없는 비즈니스’), 그리고 지고지순한 사랑에서 타락한 짐승과 같은 사랑의 세계(<강아지>, 사랑은 아래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 거야). 모두 검정치마가 드리웠던 “뻔뻔하고 그로테스크한” 그래서 아름다운 세계였다. 검정치마의 감각에 빚을 졌다고 자처할 이들이 많은 이유다.

그래서 검정치마 여성혐오 논란에 대해 예술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번 비판의 본질은 윤리적 차원 이상이다. 여성혐오, 특히 ‘성녀와 창녀’를 가르는 세계관이 검정치마의 미학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검정치마 THIRSTY 앨범 커버(사진=검정치마 공식 인스타그램)

가장 논란이 된 <광견일기>부터 보자. 이 곡에는 전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하게 되며 느끼는 씁쓸하고 자조적인 감정이 드러난다(너의 입에 반쯤 먹힌 손이/어딜 훑고 왔는지/신경 쓰지 않는 니가 신기할 뿐이야/…/내 몸을 다시 포갠 것을/후회하긴 너무 늦었고/…/내 여자는 멀리 있고/넌 그냥 그렇고/…/인간이 돼봐). 문제는 씁쓸하고 불쾌한 감정 대부분을 상대 여성에게 투사하고 있는 점이다. 반대로 여성 가수가 “내 아래에서 얼마나 들락거렸는지/신경 쓰지 않는 니가 신기할 뿐이야/내 남자는 멀리 있고/넌 그냥 그렇고/인간이 돼봐”라고 썼다면 어땠을까. 당장 활동을 접었을 것을 떠나, 굉장히 어색해 보일 것이다.

그 어색함의 정체는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이 자리 잡고 있는 탓이다. 다시 <광견일기>를 보면 전 여자친구는 한때 내 여자, ‘성녀’였다. 하지만 이제 내 여자가 아니면서 나와 잠자리를 하는 여자, ‘창녀’이다.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이 어그러지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오는 혼란을 ‘구별 없이’ 잠자리를 가지는 여성에게 돌리고 있다. 이 창녀는 머리 없는 몸의 존재, 내 소유가 아닌 존재, 그래서 <빨간 나를>에서처럼 ‘더러워질 대로 더러운’, ‘천박한 계집아이’로 비하되는 존재다. 그래서 혹여 ‘나의 그녀가 아닌 그녀’가 머리(마음)까지 나누고 싶어 하면 불쾌해하고, 난처해한다. ‘머리’는 성녀와만 나눠야하기 때문이다(<기사도>, ‘머리와 분리된 몸짓으로 구애를 했던 밤/…/원하지도 않았던 너의 속맘/우리 정분 났다고는 생각지도 마/…/사랑 빼고 다 해줄게 더 지껄여봐). 실은 이는 가부장 남성성의 흔한 레퍼토리다(박재범 <뻔하잖아>, ‘안 걸던 전화를 걸었어/사실 난 외롭고/넌 멍청한 걸 수도 있지만/내 곁에 너는 누워있지’).

흥미로운 것은 검정치마도 그 ‘뻔함’을 눈치 채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앨범 소개 ‘그럼에도 나에겐 하나같이 다 어쩔 수 없는 사랑 노래처럼 들린다’처럼 사랑의 외연을 확장하려 한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성녀와 창녀의 틀은 견고히 고수된다. ‘나의 그녀가 아닌 그녀’들과는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을 고수하거나, 불장난으로 끝날 뿐 결코 ‘영혼’과 교감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의 그녀’에 대해서도 마냥 순수하지 않다. 나를 무조건 품어줄 존재로도 그리기 때문이다(<앵무새>, ‘화려한 것들이/결국 다 날아가 버려도/…./바른말은 아니어도 속삭여주는/…/내말만 따라해 그럼/널 사랑해줄게).

무엇보다 이러한 ‘창녀’에 대한 비하는 구조적 맥락을 지운다는 데 있다. 함께 논란이 됐던 1집 <강아지>를 보자. ‘우리가 알던 여자애는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고/…/반갑다고 흔들어 대는 것이 내 꼬리가 아닌 거 같아/사랑은 아래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올라온 거야’. 돈과 욕망에 충실해져버린 사랑의 세계를 자조적으로 그린 노래다. 문제는 ‘알던 여자애’와 ‘나’의 세계는 같이 묶일 수 없다는 것이다. ‘돈만 주면 태워준다’는 표현은 성매매를 암시한다. 화자의 냉소적 어투처럼, 소위 ‘X슬아치’라고 지적받는 행위다. 하지만 이는 여성이 사회경제적 자본을 얻기 힘든 현실, 삐끗하면 자신의 성마저도 거래하도록 몰리는 현실은 여성 개인이 아닌 구조적인 타락임을 지운다. 만약 백인 가수가 ‘내가 알던 흑인은 돈만 쥐어주면 약을 가져다주고/갱단과 한통속인 부장에게 꿇는 것이 내 무릎이 아닌 거 같아’라고 쓴다면 어떨까? 흑인이 갱단으로 쉽게 흡수되는 구조와 백인의 화이트칼라로서의 현실과 섞지 말라며 거센 비난을 받을 것이다.

결국 성녀와 창녀, 영혼과 육체의 이분법은 그로테스크, 자조적 미학을 그리더라도 존재의 심연까지 닿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로 작용한다. 검정치마가 다채로운 색으로 이뤄진 검정, 존재의 그로테스크함을 뛰어나게 표현했어도 여성관만큼은 오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 논란을 두고 과하다고 할 수 있다. 힙합 장르만 보더라도 ‘범벅’수준으로 여성혐오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정치마가 그간 ‘의식 있다고 자부하는’ 청자들에게 소비되었기에 그만큼 날카로운 지적으로 돌아오게 된 면이 크다. 청자들에게 여성혐오 문제의식이 생긴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와 안태근 전 검사장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 미투시대에 제기할 수 있는 피드백, 그래서 단지 ‘프로불편러’가 아닌 시대의 피드백인 이유다. 게다가 검정치마는 이미 3년 전 인디밴드 쏜애플의 ‘자궁 냄새’ 논란 때 일부 언급되면서 여성혐오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검정치마가 이번 논란에 귀를 닫을 수 있다. 하지만 점점 여성혐오에 눈을 뜨면서 검정치마를 듣지 못하게 될 청자는 늘어날 것이다. 우리의 귀는 정직하기 때문이다. 음식 맛이 변해버린 단골집에는 나도 모르게 발을 끊는 것과 같다. 그렇더라도 오래 애정했던 검정치마의 변화에 기꺼이 귀 기울일 팬들도 아직 많을 것이다. 검정치마가 계속 빛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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