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접속’, ‘시간을 달리는 소녀’, ‘바시르와 왈츠를’, ‘지구가 멈추는 날.’ 국적과 장르를 넘어, 나열한 작품들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모두 바흐의 음악이 삽입되었다는 것입니다. 19세기가 저물기 직전 탄생한 이래, 21세기 초반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며 영화는 기술적 발전을 토대로 엄청나게 변화했지만, 18세기에 작곡된 바흐의 음악들은 300여 년의 세월이 흘러도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삽입되어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CGV 무비꼴라쥬에서 상영 중인 페르 포타벨라 감독의 ‘바흐 이전의 침묵’은 바흐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성당에 지휘자로 부임해 작곡을 하던 18세기와, 멘델스존에 의해 극적으로 재평가된 바흐 사후 50여 년 뒤, 그리고 유럽인들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늘날을 교차 편집한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제목 그대로, 바흐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인류는 침묵 속에서 살아왔지만, 그가 나타난 뒤 진정한 음악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흐 이전의 침묵’은 전위적인 영화입니다. 제목의 의미를 일깨우기 위해 오프닝에서는 침묵과 함께 카메라가 티 없이 새하얀 벽을 한참 동안 따라간 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자 없이 자동으로 연주하는 피아노가 클로즈업됩니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작품 내내 풍성하게 귀를 채운 바흐의 음악들을 마음속으로 음미하라는 의미에서 역시 침묵으로 마무리됩니다. 엔드 크레딧과 함께 극중에 삽입된 음악이 반복되는 일반적인 영화들과는 차별화됩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가볍게 허물어지며, 서사가 무의미해지고 장르적 한계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도 전위적입니다. 이를테면 바흐(크리스티앙 브렘베크 분)가 등장한 뒤, 그가 문을 닫는 장면에서 갑자기 오늘날의 바흐 투어 가이드로 전환되는 등 시공의 경계를 무너뜨립니다. 대형 트럭 기사 등 몇몇의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서사가 펼쳐지지만, 그들의 복잡한 관계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지하철 안에서 10명이 넘는 첼리스트들이 한꺼번에 연주하는 ‘무반주 첼로 조곡’이나 소년 합창단의 ‘마태 수난곡’을 감상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편이 낫습니다. 멘델스존이 바흐의 곡을 발견하는 장면에 사용된 유머러스한 삽입곡은 ‘바흐 이전의 침묵’이 뮤지컬에도 한 발 걸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흐를 조명하는데 다양한 형태의 포스트모던적인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것 자체가, 시공을 뛰어넘는 음악적 가치를 입증합니다.

102분의 러닝 타임 내내 ‘천상의 선율’이라 일컬어지는 바흐의 장엄하고도 현대적인 음악덕분에 귀가 즐겁지만, 곳곳에 삽입되는 아름다운 유럽의 고즈넉한 풍경 덕분에 눈도 즐겁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하나 꼽는다면 바흐의 많은 곡들이 극중에 삽입되었지만, 흔히 ‘G선상의 아리아’로 알려진, 가장 대중적인 관현악 조곡 3번 D장조 제2곡이 사용되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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