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기업가 정신은 보수세력이 친시장적 정책을 주문할 때 단골메뉴처럼 불러내는 마법의 주문이다. ‘기업가 정신’이란 무엇인가? 자본을 굴리는 기업가의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마음이 신기술 등 혁신의 동력이 되고 사회 발전을 추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기업가가 자유롭게 돈을 쓰며 이윤을 추구하면서 회사를 쉽게 만들고 없앨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이런 저런 규제는 완화돼야 하고 자본가에 대한 세금은 깎아줘야 하며 노동자의 해고는 자유롭게 돼야 한다.

기업가 담론 자체가 힘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자수성가’한 기업가들은 과거의 지배층과는 출신이 달랐기에 자신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따로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런 종류의 기업가 담론이나 사회진화론 따위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부의 대물림이 일반화되면서 기업가 담론의 상당 부분은 퇴색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한 기업가’의 존재를 그리워하면서 기술 발전을 새롭게 선도하는 신흥 자본가들에게 ‘기업가 정신’의 문제를 투영하게 된 것이다.

새로울 것 없는 얘기를 새삼스레 꺼낸 이유는 ‘피플파워’를 자처하는 현재의 집권 여당도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10일 조정식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제현안과 민생입법의 우선과제에 대한 여러 의견을 밝혔다. 이중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혁신 창업 붐이 이어질 수 있도록 자본시장의 구조와 관행을 혁신 친화적으로 탈바꿈시키겠다”면서 벤처기업 차등의결권 도입 등을 추진하겠다고 한 대목이다.

차등의결권 도입은 1주당 1표가 아니라 5표, 10표의 권한을 갖는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것이다. 여러 논란을 고려해 비상장 벤처기업의 창업주에 한해 이런 일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1원1표의 가치를 훼손하겠다는 것은 새 시대의 ‘공정성’ 담론에 비추어 보면 반발을 살 만한 일인데, 그럼에도 여당이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혁신성장’이 투기자본 등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혁신적 기업가가 투자자의 지분 확대를 두려워하게 돼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을 꺼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선진국 기업에도 이런 제도가 적용된다는 것 또한 이런 해법을 정당화시켜주는 근거 중 하나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번에 나온 차등의결권 도입 논의는 문재인 정권이 주요 경제정책 패러다임으로 내세운 ‘혁신성장’과 기업가 정신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가가 공격적으로 기업을 설립하고 기업을 빼앗길 걱정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기술이 더 발전해, 우리 경제가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1원 1표’라는 주주자본주의의 절대 원리를 일부 부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좀 더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다. 기업은 기업을 소유한 기업가의 의도대로 운영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또는 투기자본의 문제는 창업주로부터 기업의 소유권을 ‘빼앗아 가는’ 것에만 있는 것일까?

보수정권에서 지금의 여당이 야당의 입장에서 투기자본 문제를 제기한 것은 물론 국내기업을 국외의 불순한 세력이 강탈해간다는 차원의 문제도 있었지만 단기적 이윤창출에만 집중해 기업을 껍데기로 만들고 인건비 절감을 위한 정리해고 등을 추진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나 기업이 어려울 때 대량해고나 노조탄압과 같은 행위를 ‘혁신적 기업가’가 오히려 차등의결권 등 정부의 정책적 배려를 바탕으로 추진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더불어민주당 조정식 정책위의장이 10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문제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언급된 가업 승계시 부과하는 상속세 완화 문제이다. 이는 재계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사안이다. 중소 중견기업의 경우 1세대 창업주들이 은퇴하거나 수명을 다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상속세 문제 때문에 경영권 승계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문제이고, 그대로 둘 경우 파국적 결말을 맞이하거나 회사 가치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업 승계와 관련해서는 이미 정부가 여러 정책적 배려 수단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 수박 겉핥기에 그쳐 효용이 없으니 상속세 완화만이 답이라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미 연초부터 정치권에 대표적 현안 중 하나로 이 문제를 제기해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달 30일 “가업 상속 요건이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상당히 엄격한 게 사실”이라고 한만큼 중소 중견기업에 대한 상속세 부담 완화책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화될 수 있을 걸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업은 창업주 일가의 소유이고 이들이 가진 기업가적 특성이 성장의 동력으로 직결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대기업이 아닌 이른바 ‘강소기업’과 내수중심 시장경제는 국가주도 수출대기업 중심의 패러다임과 대비돼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게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프레임과 결합해 자본을 자유롭게 하고 노동은 비용으로만 사고하도록 하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게 ‘피플파워’ 정부가 대선과 이후 정치적 과정을 통해 내놓은 주장이다.

그렇다면 기업가 담론에서 말하는 대로 자본가가 혁신을 추동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하더라도 노동을 비용으로만 볼 게 아니라면 결국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 스스로가 경영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통해 결과적으로 혁신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의 경영참여 등 해법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제기되었을 것이다. 공공부문에서 민간으로 노동이사제를 확대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즉, 핵심은 기업가 정신을 말하면서 자본가의 힘을 더 강하게 만들겠다고 한다면 이를 감시, 견제할 수 있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힘과 권리 또한 함께 강화해야 애초에 의도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 정책을 보면 후자에는 소홀하면서 경제 성장을 위해 기업 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하는 것에만 기울어져 있다는 평가를 하지 않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민주노총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불참 문제이다. 민주노총의 사실상 불참 결정을 비난하는 목소리 일색이지만 대의원대회 당일 드러난 논리를 심층적으로 봐야 한다. 참가 후 투쟁 병행, 조건부 참여, 전면 불참 입장 모두에서 드러난 것은 정부가 사회적 대화 참여를 위한 명분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 구조가 실효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강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내수중심 시장경제라는 비전도 유지 가능한 형태가 되기 어렵다. 그저 또 다른 자본가 정권이라는 평가만을 남기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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