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제 블로그에서 '영화를 선택할 때 영향을 받는 것은?'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1위는 출연진이었고 근소한 차로 감독, 소재, 줄거리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저도 뭐 다른 분들과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만 가끔은 포스터 한 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영화의 관람 여부를 결정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제가 시각적인 부분에 약하기도 하지만 영화를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니 일종의 감이란 게 잡히기 마련이죠 ^^; 뿐만 아니라 때로는 훌륭한 포스터 한 장이 그 영화가 보여주게 될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영화 <방가?방가!>가 바로 포스터만으로 관람여부를 결정한 영화에 속합니다. 하지만 사실 평상시의 저였다면 <방가?방가!>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패스했을 영화였을 겁니다. 배우 김인권을 좋아하긴 하지만 주연감으로 썩 어울린다고는 보지 않고, 코미디 영화라고는 하나 포스터에서는 속된 말로 '싼 티'가 줄줄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방가?방가!>를 본 이유는, 여름과 겨울 사이의 유일한 대목인 추석 연휴를 노리고 많은 영화가 한꺼번에 왕창 개봉한 탓이었습니다. 개봉한 주에 영화를 죄다 봤더니 일주일이 넘게 극장을 못 가서 금단증상이 일어나지 뭡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방가?방가!>라도 보자는 심산이었는데... 오호라~, 이거 안 봤으면 조금 섭섭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 태식은 취업난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매번 낙방을 거듭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다 하루는 우연히 동남아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고, 이를 계기로 쭉 동남아인 행세를 하며 취업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어딜 가나 그는 일솜씨가 형편없었던 데다가 위장신분이 들통 나면서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입니다. 이 위기를 타개하고자 마침내 태식은 최후의 수단으로 부탄에서 온 '방가'로 위장합니다. 왜 하필 부탄이냐고요? 우리나라에 있는 부탄사람이라곤 대사와 그 부인이 전부라 들킬 염려가 없거든요. 이렇게 하여 취업한 의자공장에서 태식은 각 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일하고 어울리며 가까워집니다. 그들을 위해 대변인 노릇을 하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면서 차츰 진심으로 대하게 되죠. 그러나 대출금 문제로 인해 태식조차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등골을 빼먹는 악랄한 자가 되어야 할 위기가 찾아오는데...

이상의 줄거리에서 알 수 있다시피 <방가?방가!>는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코리언 드림'을 좇아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착취를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현실이죠. 사실 이러한 이야기를 코미디로 풀어낸다는 건 상당한 도박에 해당합니다. 무겁게 풀어내자니 코미디란 장르에는 어울리지 않고, 그렇다고 가볍게 풀어내자니 소재 자체가 꽤 무겁습니다.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될 확률이 높은 편에 속하기 때문에 쉽게 시도해볼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과감하게 외줄타기를 시도한 <방가?방가!>는 코미디 장르를 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성공적인 혹은 적어도 실패로 귀결되지 않은 영화로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코미디 영화로 꼽는 것은 휘발성, 일회성 웃음에 그치지 않는 영화입니다. 즉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웃음 속에 진중한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이를테면 페이소스를 유발하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코미디와 드라마를 적절히 혼합할 줄 아는 영화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 어바웃 어 보이, 러브 액추얼리> 등의 영국 코미디 영화를 참 좋아합니다. 이 영화들은 - <러브 액추얼리>는 좀 덜한 편이지만 - 모두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도 능숙한 연출솜씨를 뽐내며 유쾌하게 풀어간 수작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그런 시도를 종종 선보였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대부분 시도에만 그쳤다는 거죠. 이를 두고 저는 '과욕'이라고 불렀습니다만, 모처럼 <시라노 연애조작단>이 근접한 형태를 띄고 있더군요. 반면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감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현실적으로 가장 모범적인 코미디 영화로 꼽는 것은 생각 없이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코미디 영화라면 잘 웃기기만 해도 중간은 가는데, 중반까지 잘 나가다가도 강박증 환자마냥 후반부에 다다라 괜히 교훈과 감동을 주려고 욕심부리지 않는 그런 영화말입니다. (이 욕심이 한국 코미디 영화의 가장 큰 고질병입니다)

그렇다면 <방가?방가!>는 아슬아슬하게 그 중간에 위치한 영화에 해당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방가?방가!>는 설정의 상당수가 현실의 사회적인 문제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극 중에서 태식의 학력에 대한 언급은 없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어쨌든 그는 '평균이하의 외모'로 인해 면접에서 줄줄이 낙방하며 '취업난'에 시달립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수단이 외국인으로 분해 취업하는 거였는데, 거기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대면하게 됩니다. 한국인과 달리 강제적으로 근무에 투입되고, 근무환경도 형편없고 그러면서도 급여는 적으며, 여자는 성추행까지 당하는가 하면, 불법체류로 인해 아무런 보상조차 못 받고 쫓겨나기도 합니다.

사실 이처럼 무거운 소재들이 <방가?방가!>에서 적절하게 다뤄졌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관객들에게 웃음과 함께 진지한 물음표를 던질 만큼의 깊이를 담은 영화는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역대 코미디 중 가장 우수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게 됐겠죠. 대신 <방가?방가!>는 과욕을 줄이며 이상이 아닌 현실을 택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각 소재와 설정의 결합으로 이뤄진 배경이야기를 관객에게 목도하게 만들면서도 태식을 통해 시종일관 웃음을 유발하는 데 집중합니다. 그 결과 <방가?방가!>는 보다 코미디 영화로의 본분에 충실합니다. 이만하면 적어도 휘발성 웃음에 그치지는 않을 정도에 해당하며, 그만큼 <방가?방가!>는 영화에서 캐릭터와 배우의 힘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방가?방가!>를 맘에 들어하는 이유는 비교적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말부에 자제력을 잃고 참아왔던 욕심을 어설프게 드러내는 바람에 점수가 좀 깍였습니다만, 이 정도는 그간 숱한 한국의 코미디 영화들이 저질러왔던 오류를 보완한 축에 속합니다. 더욱이 <방가?방가!>는 사실상 출발점부터가 그냥 웃기면 그만인 영화가 아니었던 것을 감안하면 꽤 성공적입니다. 그러니까 도박판에서 적어도 판돈을 다 잃지는 않은 영화라는 것이죠. 보는 이에 따라서 어중간한 영화로 다가갈 우려도 없진 않습니다만 저는 아슬아슬하게 커트라인을 통과한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P.S) 김인권은 제가 가늠했던 것 이상의 능력치를 가진 배우라는 것을 <방가?방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김정태가 의욕이 앞서 다소 부족한 연기를 선보였던 데 반해서 김인권은 거의 완벽하게 캐릭터와 부합하더군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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