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쉬고만 있어도 시놉시스라도 한번만 읽어달라며 출연 요청이 끊이질 않는 몇몇 소수의 스타분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배우들은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살아갑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배역, 맘에 드는 장르, 이전 작품과는 다른 변신 등을 원할 수는 있지만 그런 욕심을 모두 충족시키려면 자신이 스스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거나,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스타가 되는 수밖에 없어요. 물론 작품 안에서 배역의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한다든지, 처음 설계와는 다른 방향으로 존재감을 발전시키는 등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이 역시도 우선 선택받은 이후에 스스로의 역량으로 조정하는 것에 불과하죠.
그런데 이번 주 라디오스타를 보며 이런 선택받는 것에 익숙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만큼 긴 연기자 생활을 살아온 배우의 입에서 전혀 의외의 기분 좋은 반전을 발견했습니다.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들을 게스트로 모신 방송에서 출연자 중 가장 연장자이자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스스로의 관록을 자랑하는 배우 안정훈의 유쾌하고 올곧은 신념 덕분이었어요. 시종일관 건강하고 솔직한 에너지를 자랑한 이 친숙한 미중년 배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배우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고 그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꾸준한, 그렇지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지 않은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주 유난스럽고 호들갑을 떨면서 자랑한 것도 아닙니다. 30여 년의 활동기간동안 지킨 작은 규칙, 그저 자신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세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불륜 연기를 할 수 없기에 그런 배역들을 고사하며 살아왔다는 말이죠. 2월에 마무리된 작품 이외에 현재 하고 있는 작품도 없고, 간간히 쇼프로그램에만 출연하며 봉사활동만 하고 있다는 담담한 토로이지만 그야말로 김구라의 말처럼 돈만 벌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에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없기에 할 수 없다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것도 아역배우부터 활동하며 그 바닥의 생리를 알 것 다 알고, 거칠 것을 다 거친 산전수전의 백전노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더욱 그랬죠.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하지 않는 무거운 결심이거든요.
저는 감탄하고 말았어요. 그렇다고 불륜과 막장이 판치는 드라마가 가지는 의미를 무시하는 것도, 그런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즐기고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 있고, 그 안에서 연기로 보여주는 배우로서의 표현이 있습니다. 주제가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고, 납득이 안가는 상황이 많을수록 그것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웬만한 헐거운 드라마보다 훨씬 더 원숙하고 농익은 연기들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이들이야말로 한국 드라마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고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짝 뜨고 또 사라지는 스타들과는 달리 꾸준히 언제나 곁에 머물면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