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쉬고만 있어도 시놉시스라도 한번만 읽어달라며 출연 요청이 끊이질 않는 몇몇 소수의 스타분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배우들은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수세적인 입장에서 살아갑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배역, 맘에 드는 장르, 이전 작품과는 다른 변신 등을 원할 수는 있지만 그런 욕심을 모두 충족시키려면 자신이 스스로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거나,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목소리를 키우기 위해 스타가 되는 수밖에 없어요. 물론 작품 안에서 배역의 캐릭터를 새롭게 해석한다든지, 처음 설계와는 다른 방향으로 존재감을 발전시키는 등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이 역시도 우선 선택받은 이후에 스스로의 역량으로 조정하는 것에 불과하죠.

그렇다고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수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작품과 작품 사이의 공백 기간동안 딱히 수입원이 없는 이들이기에 선택권은 더더욱 줄어들기만 하죠. 누군가가 찾아주기만 한다면 무슨 역할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생계형 배우들. 우리가 안방극장에서 만나는 무수히 많은 연기자들은 대부분 이런 열악한 조건 아래서 선택받고 일하고 다시 기다립니다. 자신의 연기 세계를 위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다느니, 늘 색다른 변신과 진화를 꿈꾼다느니 하는 푸념이나 고백은 몇몇 정말로 잘나가는 이들의 한가한 사치일 뿐입니다. 배우들에게 연기란 자아실현, 꿈을 위한 도전, 고상한 예술 활동이기 이전에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직업이니까요.

그런데 이번 주 라디오스타를 보며 이런 선택받는 것에 익숙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만큼 긴 연기자 생활을 살아온 배우의 입에서 전혀 의외의 기분 좋은 반전을 발견했습니다. 아역배우 출신 연기자들을 게스트로 모신 방송에서 출연자 중 가장 연장자이자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스스로의 관록을 자랑하는 배우 안정훈의 유쾌하고 올곧은 신념 덕분이었어요. 시종일관 건강하고 솔직한 에너지를 자랑한 이 친숙한 미중년 배우는 누군가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살 수 없는 배우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키고 그대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꾸준한, 그렇지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지 않은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주 유난스럽고 호들갑을 떨면서 자랑한 것도 아닙니다. 30여 년의 활동기간동안 지킨 작은 규칙, 그저 자신은 한 가정의 가장이고 세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불륜 연기를 할 수 없기에 그런 배역들을 고사하며 살아왔다는 말이죠. 2월에 마무리된 작품 이외에 현재 하고 있는 작품도 없고, 간간히 쇼프로그램에만 출연하며 봉사활동만 하고 있다는 담담한 토로이지만 그야말로 김구라의 말처럼 돈만 벌 수 있다면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세상에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없기에 할 수 없다는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것도 아역배우부터 활동하며 그 바닥의 생리를 알 것 다 알고, 거칠 것을 다 거친 산전수전의 백전노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더욱 그랬죠.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하지 않는 무거운 결심이거든요.

저는 감탄하고 말았어요. 그렇다고 불륜과 막장이 판치는 드라마가 가지는 의미를 무시하는 것도, 그런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을 폄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즐기고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 있고, 그 안에서 연기로 보여주는 배우로서의 표현이 있습니다. 주제가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이고, 납득이 안가는 상황이 많을수록 그것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웬만한 헐거운 드라마보다 훨씬 더 원숙하고 농익은 연기들을 보여주는 배우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요. 이들이야말로 한국 드라마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고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짝 뜨고 또 사라지는 스타들과는 달리 꾸준히 언제나 곁에 머물면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들 인기와 화제를 끌기 위해 막장에 치우치고,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자극적인 내용들만 강조하는 이 세상에서 여전히 그러고 싶지 않다는, 소박하게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을 만큼의 소득에 만족하고 지키고 싶은 가치를 간직하고 있는 안정훈의 말은 낯설지만 반가운 따스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화제와는 멀리 떨어져있는 중년 배우이지만 이런 올곧은 마음을 간직한 배우도 있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에요. 세상을 바꾸는 가장 단순하고, 가깝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누구나 할 수는 없는 어려움. 지금의 현실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 투덜대는 것보다 자기 자리에서 지킬 수 있는 가치를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니까요. 막장 세상에서 발견한 돈키호테 같다고나 할까요? 라디오스타같이 독한 방송에서 이런 신선함과 건강함을 느끼다니. 이 프로그램이 뿜어내는 재미의 스펙트럼은 진짜 다양하네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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