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미국에서 넘어온 프로레슬링의 붐은 남자 아이들의 어린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들의 포즈나 기술을 흉내 내거나, 매주 쇼에서 만들어지고 고조되어 해소되는 갈등 관계, 라이벌들의 다툼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그 결말을 추측하거나 예상하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죠. 누가 가장 쎈 선수냐, 다음 주 타이틀매치의 승자는 누구냐, 어떤 기술이 제일 강력하냐 등등.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말싸움을 벌이게 했던 것은 링 위에서 벌어지는 그 화려한 격돌이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였었어요. 몇몇 똘똘한 아이들은 주먹이 허공을 가르거나 공중에서 헛도는 동작들을 지적하며 가짜라고 말했었고, 화려한 기술과 격렬한 격돌에 흥분했던 순수한 아이들은 과장되긴 했지만 그들의 대결은 진짜라며 핏대를 새우곤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코흘리개 시절 친구들과 그렇게 격렬하게 부딪쳤던 기억도 별로 없어요.

무한도전이 프로레슬링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도 바로 그 어린 시절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다투며 즐겼던 그때 그 당시의 추억이었습니다. 진짜냐 아니냐, 리얼이냐 조작이냐의 이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타고 있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원조이자 수많은 복제품들이 TV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 여전히 가장 앞자리에서 흐름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예능의 선두 주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한도전만큼 프로레슬링이란 주제가 어울리는 프로그램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까지 수행했던 운동 경기를 소재로 한 다른 장기 프로젝트처럼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도전할 수는 없는 주제이긴 했지만 이번 프로레슬링 특집이야 말로 그들이 체험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도전이란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이들은 모두 프로레슬러와 같은 것을 수행하는 연예인이니까요. 완벽한 합을 서로 조율하며, 기술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받는 이의 역할이 있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에이스가 있으면 리액션으로 그 웃음을 살려주는 도우미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아무리 리얼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총 책임자이자 기획자인 PD, 각종 부대 환경을 제공하고 전체 맥락을 잡아주는 작가들, 그들의 뒤를 끈질기게 쫒아 다니며 출연진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카메라에 담는 수많은 스텝 등등의 많은 이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어 갑니다. 방송 상의 캐릭터도 출연자들 일상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시도 성격의 일부분을 재미를 위해 극대화시킨 일면에 불과하구요. 방송을 하다보면 분량 확보를 위해, 그 재미를 위해 상황을 일부러 확대시키고 혹은 생략하고 의도적으로 계산하기도 합니다. 이런 만들어진 인공적인 환경에서 그들은 도전도 하고 여행도 하고 게임도 경쟁도, 심지어 이젠 결혼까지 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철저하게 계산되고 합의된 조건에서 촬영된 결과물이라 해도, 그것조차도 편집을 거쳐 또 한번의 조율과 걸러짐 이후에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을 단순한 허구, 조작,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방송되는 내용에 의해, 다시 그들에게 전달되는 방송의 반응에 따라 이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 그 안의 감정은 모두 사실이거든요. 그렇기에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연예인들은 어쩌면 그냥 단순한 리얼을 보여주는 것보다, 그냥 웃기기 위한 버라이어티보다 훨씬 더 잔인한 환경에 자신을 드러내고 상처 입히고 고통 받습니다.

무한도전 프로레슬링 특집은 이런 리얼 버라이어티의 화려함과 즐거움 뒤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살짝 보여줍니다. 그저 사각의 링 위에서의 즐겁고 유쾌한 축제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 이들의 무대 뒤 모습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겪는 충격, 아픔, 고통스러움으로 다가온 것이죠. 어쩌면 프로레슬링을 가볍게, 만만하게 본 것은 시청자인 저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화려한 쇼를 위한 과정이 이다지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 힘들고 아픈 준비를 거친 것들이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무심했다고나 할까요. 어린 시절 환호를 보냈던 공중을 날아다니고, 서로를 집어던지며 몸을 부대끼는 근육질 남자들의 쇼는 이렇게나 잔혹하고 힘겨운 연습의 산물이었어요.

그러니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의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우리는 주말 저녁을 즐겁고 유쾌하게 보내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어떨까요. 이 경기가 실제 승부를 가리는 격투 경기였다면 멤버와 제작진들은 경기를 포기했을 겁니다. 긴장감에 구토를 일으키고, 힘이 안 들어가는 허리 통증, 갈비뼈가 금이 간 상황에 진통제를 맞아가며 위험한 시합을 강행하는 것은 리얼리티에 반하는 행동이에요. 반면에 이것이 단순한 버라이어티였다면 경기는 훨씬 더 웃음과 즐거움에 초점이 맞추어진, 위험요소를 철저히 배재한 단순한 쇼가 되었을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출연진들이 1년 동안이나 스스로를 닦달하며 준비하는 대신, 그냥 간단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과 과장된 연기를 중점적으로 하며 그동안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추석특집 몸개그쇼처럼 어설프게 흘러 보낼 수 있었겠죠.

하지만 이들은 한국의 대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215회를 거듭하며 시청자들에게 그 진정성을 납득시켰던 무한도전을 찍고 있습니다. 리얼하지만 웃겨야 하는, 웃기면서도 동시에 리얼해야 하는 그 위태위태한 곡예를 하고 있는 것이죠. 무도 멤버들이 비명을 지르는 상처투성이의 몸뚱아리에 또 다시 덕지덕지 파스를 붙이며 링 위로 나서는 것은 정도만 다르다 뿐이지 그동안 무한도전의 수많은 과제들에서도 다른 형태, 다른 방식으로 호소했었을 고통과 아픔의 일부분입니다. 프로그램 속 캐릭터 때문에 욕을 먹고, 활약이 떨어지거나 적응하지 못한다고 비난받고, 사소한 실수에도 매장당하는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나요. 그래도 그런 상처투성이의 몸과 마음을 가기고 또 한번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서 다시 또 다른 특집을 준비하며 화면 앞에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운동선수도, 일반인도 아닌 무대 뒤에선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고, 두려움과 공포에 몸을 떨지만 빛나는 조명 아래서는 태연하게 자신이 맡은 연기를 하고 미소를 날리며 웃음을 주어야 하는 연예인이니까요.

그래서 제게 무한도전의 프로레슬링 특집은 그들 스스로에게, 그들의 뒤를 따라 파생된 수많은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게, 그리고 그것을 보며 즐기는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무거운, 조금은 잔혹한 질문 같습니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지, 그 즐거움을 위해 희생되는 연예인들의 아픔은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예능프로그램에 요구하는 진정성과 리얼이란 것이 얼마나 잔혹한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죠. 어쩌면 점점 선정적이고 노골적으로 향해가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추세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겠네요. 지금 시기에 반드시 필요했지만 무한도전이 아니었다면 쉽게 하지 못했을, 스스로 자신의 발을 찍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거는 괴로운 자기 고백입니다.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를 열었던 그들이기에, 그리고 지금도 누구보다 앞서가는, 언제나 고민하는 그들은 그런 질문과 경고를 할 자격이 있어요. 이제 전설로 남을 유재석과 정형돈의 포옹은 이런 힘겨움과 아픔을 안으면서도 최선을 다한 우리 시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서로에게 주는 위안과 위로, 그리고 자기들 스스로가 찾아낸 해답입니다. 결국 웃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되려 시청자이자 관객인 우리에게 웃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웃기면서도 슬픈 연예인의 대답이죠.

그렇다면 이 무거운 질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답은 무엇일까요? 복잡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없어요. 우린 그저 웃고 감동하고 응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만한 정답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저 마지막에 유재석이 정형돈을 말없이 안아주었을 때 마음에 울컥했던 감동을, 몸을 던져가며 보여준 시합에서 느꼈던 긴장과 즐거움을 잊지 않고 환호와 응원으로 응답해주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이런 프로그램과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에요. 그러니 오래 두고두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번 같은 혹사와 무리는 없었으면 합니다. 오랫동안 전설로 남을, 한국 예능 역사상 가장 감동스러운 명장면인 유재석과 정형돈의 포옹으로 끝났던 이번 프로레슬링 특집에서 제가 가장 지켜 주었으면 하는 부분 역시도 가장 단순한 바람입니다. 그들이 지난 주 연예인이란 노래를 통해 했던 프로포즈처럼 '평생' 웃게 해줄 거란 말이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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