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45화가 아픔이었다면 46화는 그 아픔을 상처 없이 낫게 해준 행복의 치료약을 맛보게 했다. 그 행복의 치료약은 아버지와 아들의 아름다운 여름 소풍이었다. 요즘은 엄마같이 따뜻한 아빠도 참 많아졌지만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수록 아빠는 아버지가 된다. 그것도 과묵하고 엄한 아버지의 굳은 표정이 된다. 지금 누군가의 아빠가 된 사람이라면 그런 말없는 아버지의 표정이 전부일 것이다. 더욱이 조선시대라면 아버지란 이름은 감히 그림자도 밟지 못할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손이 귀한 왕실이라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태어난 것을 알고도 보지 못하고 내내 6년을 보낸 아버지라면 그런 지엄한 표정에서 나와 한없이 살가운 아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날 아들 금이를 만난 숙종은 열일 제쳐두고 아들을 보기 위해 일찌감치 서당 앞에서 기다렸던 보람이 있었을까? 아이들의 장난을 피해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돌아온 서당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그것은 숙종으로서도 마찬가지다. 장희빈이 낳은 세자도 있고, 태어나서 금세 죽은 영수도 있었지만 아비와 아들의 정을 나눈 기억은 없다. 특히나 저자거리의 사내를 동경했던 숙종으로서는 마음 한 쪽에 북받치는 슬픔에 사무치면서도 아들 손을 잡고 사당패를 구경하고, 씨름판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몸을 맞대고 힘을 겨루는 등의 일들이 꿈같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는 물가로 가 아들과 함께 웃통을 벗고 물장난을 칠 때는 그곳이 세상의 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였을 것이다. 6년 만에 만난 어린 아들이 사랑스럽고 또 미안하니 하나의 표정으로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아비를 전혀 원망하지 않는다는 금이의 말이 또 가슴 속에 북받쳤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도 슬픈 아버지와 아들의 하루는 영화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영화라면 이토록 행복한 하루 뒤에는 가슴 메이는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숙종과 금이의 하루를 보면서 그 아름답고 슬픈 모습에 천상병의 시 ‘귀천’을 떠올린 사람이 혹시 없었을까 모르겠다. 길지 않은 시라 전문을 감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숙종과 금이의 소풍이 딱 맞는 시라고 하기는 다소 어렵지만 그 장면을 보는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을 표현할 시로는 귀천이 최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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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입궐해 숙종을 만나서는 왕에게 “아니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등의 반응과 이런저런 사정을 들은 동이가 숙종을 흘겨보는 표정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는 금이가 똑같은 말로 흉을 본 이야기 등 6년이란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했던 동이 가족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장면을 그리기에 적당한 에피소드를 통해 긴 시간을 어색하지 않게 줄일 것이다. 특히 아래 대화는 숙종과 금이 모두 잊지 못할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숙종에게 금이가 어떤 의미에서는 윗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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