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주연 배우들만 잘나서 드라마가 성공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것도 짧은 호흡,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20부작 이내의 작품이 아닌 거의 반년을 넘어가는 긴 흐름의 드라마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아무리 주인공들의 인생 역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들의 역경 극복 스토리에 마음을 졸인다 해도 단지 그들의 이야기만으로 일주일에 두 시간씩을 채워 버릴 수는 없는 법이에요. 매번 힘겹게 갈등과 절망을 겪어야 하는 주인공들도 숨을 돌릴 여유를 만들어주고 별도의 잔재미를 안겨줄 수 있는, 그리고 이야기의 경우의 수들을 복잡하게 엮어줄 수 있는 특급 조연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죠.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도 받지 못하던 조연이 밋밋한 주연을 잡아먹는 경우가 많이 생겨나는 것도, 그래서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신인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극의 흐름을 이끌어나가야 할 주인공으로 그 행동 패턴과 진행이 어느 정도 뻔하게 정해져 있는 주연들에 비해서 어느 정도의 자유스러운 변화가 가능한 조연들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도 수월하고 그 안에 배우로서의 매력을 투영하는 것도 좀 더 편하거든요. 그리고 이런 재미난 조연의 발견은 길게 늘어지는 드라마에 또 다른 활력을 불어놓으며 그 작품 자체의 생명력을 연장시켜 줍니다. 사실 이런 곁가지 재미야말로 드라마를 보는 즐거움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벌써 43회, 시간상으로는 벌써 3월말부터 반년을 넘어가고 있는 월화드라마 동이에선 이런 눈에 띄는 조연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극초반 그나마 눈길을 끌던 최철호는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사라져 버렸고, 짝사랑 전문배우 배수빈은 숙종의 사랑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게 좋은 오빠로 전업선언을 했습니다. 그나마 나름의 존재감을 보여주던 정진영의 호연도 이젠 그 유통기한이 지나 버렸어요. 이계인, 이희도, 그리고 이광수의 잔재미는 이병훈 PD식 사극에 늘상 등장하는 웃음 감초 역할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죠.

이렇게 기존 출연진들의 힘이 떨어질 때쯤엔 중간에 투입된 이들에게 구원투수의 역할을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 그마저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뭔가 야심차게 등장했던 장희재 역할의 김유석은 그냥 매력 없고 무능한 때쟁이 패륜아였고, 동이의 책사로 나온 심운택 역의 김동윤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그저 무난하게 안착했습니다. 최근 장희빈의 회심의 카드로 기용된 장무열도, 동이를 곤경에 빠뜨린 소꿉동무 게둬라의 등장도 큰 관심과 인기를 얻지 못했죠. 등장인물들은 북적거리며 등장하지만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이들만 점점 더 늘어만 가는, 동이는 이상하게 사람만 많은 밋밋한 사극이 되어 버렸어요.

그냥 다 병풍 같다는 말입니다. 나름의 역할도 있고 보여주고 싶은 개성도 있지만 그 안에 깊이가 전혀 없는, 시청자들이 납득하고 그것에 매료될만한 그들 나름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전혀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숙종과 동이의 궁중 러브스토리를 빛나게 해주기 위한 카드로만 활용될 뿐이에요. 이렇게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단순한 조연들만 적채되고 있으니 결국 이야기의 재미를 몽땅 책임져야 하는 주인공들만 더더욱 무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그렇게 명민했던 군주 숙종은 사랑에 빠져 사리분별도 힘겨워하는 필부로 변했고, 뭐든지 척척 박사였던 슈퍼우먼 동이는 왜 그런 무리한 행동으로 일을 그르치는지 알 수 없는, 무모함만 남은 이상한 엄마로 변했습니다.

방송 연장으로 더더욱 길어진 내용을 이끌어가기엔 너무나 힘겨워 보이는 주인공들만 남아버렸단 말이죠. 또 새로운 갈등을 만들어준 누군가가 또 다시 등장한다고 하고, 그나마 아직까지 여력이 남아있는 인현왕후의 변신이 예고되고는 있지만 이렇게 주인공들을 향한 지나친 편중과 병풍으로 기계적인 모습만 보여주는 조연들로는 이미 꺾여버린 동이의 기세를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 드라마에서 필요한 것은 괴물로 변해버린 주인공들의 활약이 아니라 좀 더 감칠맛 있게 볼 수 있게 도와줄 이산의 홍국영, 선덕여왕의 비담, 추노의 천지호에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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