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남자는 갑옷을 입는다.’ 최근 화제가 된 웹툰 제목으로, 여성다움을 강요하는 ‘코르셋’ 못지않게 남성들에게도 강요되는 남성다움인 ‘갑옷’이 있음을 토로한 내용이다. 몇 매체에서는 이에 대해 ‘강하고 용감하고 희생해야 한다’로 대변되는 사회적 남성성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탈 갑옷’을 외치는 남성들은 ‘갑옷’의 대표적 사례로 사무실 정수기 생수통 갈기, 용변 중 들이닥치는 여자 청소부, 무거운 짐 들기를 든다. 여기에 나라를 위해 병역의 의무를 치르고 가족을 위해 야근과 외근을 감내하는, 가부장의 어깨로 상징되는 ‘갑옷의 무게’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는 ‘남자들이 대단한 특권 없이 힘들게 사는데 페미니스트들이 대뜸 기득권이라고 손가락질한다’는 안티 페미니즘의 불만과도 상통한다.

tvN 드라마 변혁의 사랑(tvN)

실제로 남성에게 강요되는 남성다움이 있고, 페미니스트들 역시 이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이미 남성다움의 굴레를 뜻하는 ‘맨박스(man box)’라는 용어도 있다. 하지만 가부장제 하에서 맨박스의 무게는 결코 여성이 받는 차별과 같지 않다. 우선 용어 ‘갑옷’과 ‘코르셋’부터 그렇다. 갑옷은 전쟁터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입는’ 옷인 데 비해 코르셋은 몸을 해치며 ‘억지로 입는’ 옷이다. ‘갑옷 입은’ 남성은 밤길을 별 위협 없이 다니며 여성들에게 ‘오빠가 지켜줄게’라고 말할 수 있다.

갑옷과 코르셋은 각각 ‘갑’옷과 ‘을’옷이다. 갑옷을 입는 자에게는 말, 창과 방패도 주어진다. 각각 재산, 힘(권력)으로 상징된다. 반면 코르셋을 입는 자에게는 밥, 꽃, 양의 역할이 주어진다. 각각 가사노동, 성적 대상화, 희생양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이 역할의 차이는 유리천장, 임금 차별, 외모 가꾸기 압력, 독박육아 등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갑옷은 특권의 옷, 코르셋은 차별의 옷이다.

(만화가 윤서인 씨 페이스북 캡쳐)

이는 ‘갑옷’의 사례들을 뜯어보면 선명하다. 여성들은 사무실에서 손님 방문 시 커피를 타는 접대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남자 화장실 속 여성 청소부의 존재도 화장실 청소와 같은 가사 및 돌봄 노동을 여성이 전담하는 데다, 성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를 때리면 안 된다’는 교육은 폭력범죄 가해자의 대다수가 남자라서다. 고된 업무를 지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은 여성도 마찬가지다(그리고 여성들의 업무 선상에 ‘룸살롱’은 없다).

그런데 웹툰 ‘남자는 갑옷을 입는다’의 결말은 ‘갑옷을 벗자’가 아닌 갑옷 입은 우리를 ‘인정해 달라’다. 우에노 치즈코가 저서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통찰했듯, 이 갑옷 속 남성성은 “여자가 남자를 떠받드는 것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연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여자가 ‘무시해서, 이별을 고해서’라며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다. 그래서 ‘강하고 용감하고 희생하는’ 남성다움의 강요도 실은 여성다움의 희생이다. ‘남자가 울기나 하고’는 여자는 자주 우는 감정적인 존재, ‘남아일언 중천금’은 여자는 결심이 약한 존재, ‘남자가 이것도 못 하냐’는 여자는 무언가 못하는 존재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 인터넷 유저의 웹툰 남자는 갑옷을 입는다 일부 캡쳐

기사도 정신은 그나마 ‘오빠가 지켜준다’며 무거운 짐을 드는 등 시혜적 배려로 생색낼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기사도 문화보다는 여성들을 ‘조신하라’며 단속하는 쪽이었다. 남자들은 갑옷을 두르고 창을 들어서 해칠 수 있는 ‘늑대’이므로. ‘탈 갑옷’은 ‘오빠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을 향해 이제 생색조차 안 내겠다는 주장이다. 약자로서 여성을 위해 마련된 총여학생회나 여학생 휴게실에 대한 반대, 더치페이 주장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생수통이 그렇게 참을 수 없이 무거운가? 요새 정수기는 수도관을 연결해 쓴다. 여자들에게 불만을 품을 게 아니라 회사에 정수기 교체를 요청하면 된다. 군대도 ‘군대를 현역으로 다녀와야 남자지’라는 편견이나 군대 문화 개선 운동부터 하면 된다. 남성다움을 깬다고 가부장제가 아닌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것은 돈키호테처럼 풍차에 달려드는 것만큼 엉뚱한 일이다. 갑옷에 부여된 임금 격차, 승진 기회의 무게까지 함께 분담하자. 이 이야기 없이 생색내는 ‘남성다움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이 가볍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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