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는 8월부터 올해 말까지 5개월간 기존의 100Mbps 초고속인터넷보다 10배 빠른 1G 인터넷 시범서비스를 시행한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시범서비스는 서울의 압구정동, 평창동 지역의 현 QOOK인터넷 가입고객 중 500가구를 대상으로 진행하며, 신청 가구에는 기가용 랜카드를 무상 지급, 기가 인터넷을 체험하게 하고 5개월간 체험기간을 거쳐 추후 설문 등으로 이용자 의견을 수렴, 상용서비스에 반영할 예정이다. ⓒ 연합뉴스
올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인터넷이 거론되고 있다. 일단 노벨상이 가진 갖가지 추문은 제쳐둔다면 이런 흐름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다. 지금까지 어떤 매체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적이 없다. 텔레비전도, 영화도, 라디오도 나름 여러학자들에 의해 (물론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혁명적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인터넷만한 명성을 누리지는 못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인터 네트워크(inter + network)의 준말로 상호적인 관계망을 일컫는 것이다. 노벨 평화상은 그것이 수상자든 후보자든 모두 개인이나 단체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그런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상호 연결시키는 관계망 자체이다. 인터넷에 노벨 평화상을 주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주체가 아니라 주체들 사이의 공간, 즉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관계’를 평화의 계기로 사유하려는 행위이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관계라는 것은 ‘1대 1’, 혹은 ‘1대 다(多)’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 ‘1대 1’의 관계가 대면적 관계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것이라면, ‘1대 다’의 관계는 기술적 매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것이었다. 특히 후자의 관계 방식은 1의 위치를 점하는 것이 대중을 상대로 일방적인 독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화를 예비하고 있다. 신문, 방송, 영화, 텔레비전 등의 현대사회의 매체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 형식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인터넷은 이것들과 다른 방식의 관계를 가능케 했다. ‘다(多)대 다(多)’의 방식이 그것이다. 그곳에서 권력의 계기는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일방적 독백보다는 상호적 대화가 강화되는 듯하다. 상호적 대화를 통해 정치적 논쟁이 활성화 되어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들을 사유할 수 있다면, 기존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주체들이 가진 폭력적 모습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그것들의 궁극적 폐기로 전환될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될 수 있다면, 그리고 인터넷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새로운 관계 유형의 도입을 가능케 한 인터넷이 평화상을 수상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은 과연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인터넷이 도입된 이후 한국 사회는 어떤 근본적 변화를 겪어 왔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인터넷이 도입되고 활성화된 이후 한국은 더욱 평화로워졌는가? 인터넷은 잠재적 가능성의 공간이고, 그 잠재성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끝내는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라면, 결코 도래할 수 없는 ‘미래’의 잠재성이라면, 혹은 그 잠재성들이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억압되고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보여주는 환상의 미래를 걷어내고, 그것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인터넷이 도입시킨 ‘다대 다’라는 관계 방식을 보자. 이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다대 다’의 관계에서 개입과 토론의 주체들이 능동성을 가지고 상호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소위 상호작용성, 혹은 상호능동성(inter-activity)이라 부른다. 인터넷이 불러오는 수많은 가능성들은 바로 이 능동적 상호작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사용하는 주체들을 능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능동적인 참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노이즈를 만들어내는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권력을 가진 지배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중(그들을 민중, 군중, 다중, 피지배자 등 그 무엇으로 불러도 관계없다)을 순수한 존재라거나 혁명적 저항의 주체로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 전혀 능동적이거나 저항적이지 않다. 오히려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을 가진 이들이라 해도 좋다.

그들에게(자꾸 이렇게 뭉뚱그려서 ‘그들이’ 하나의 속성을 공유한 것처럼 이야기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편의상 그들이라 불러보자. 물론 ‘그들’에는 ‘나’도 포함된다) 인터넷은 블로그와 동호회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공간이며,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거나 놓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다운받아 보고, 게임과 쇼핑을 하는 (복잡한 기능을 가진)단순한 도구이다. 물론 기업의 횡포나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뉴스에 비판적인 댓글을 달거나, 트위터에 4대강 사업을 비난하는 강한 정치적 색채를 가진 글이 상당한 양으로 올라온다. 그런데 댓글이나 트위터의 짧은 논평이 능동성이고, 저항이며, 인터넷의 가능성인가? 조직적 힘으로 전환되기보다는 과잉된 언어를 통해 정치적 포만감을 제공하는 것,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능동성 보다는 수동성의 근거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인터넷의 기능아닌가.

인터넷과 관련해서 결코 간과해서 안되는 또 하나의 지점은 인터넷의 형성과 유지와 관련된 정치경제적 기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경시할 때 우리는 단순한 논리의 매체결정론에 빠지게 된다. 매체는 고유한 ‘관계 방식’을 가지지만, 그것 자체가 정치경제적 조건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인터넷의 기원인 아르파넷(ARPANET)이 미국방부의 첨단기술연구계획국(ARPA)에 의해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 미국은 1990년에 ‘정보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하고 인터넷 민간화 이후의 지구적인 정보화를 예비했다. 이에 기초해 1993년 ‘국가정보하부구조(NII)구상 행동계획’과 1994년 ‘지구정보하부구조(GII) 구상’을 발표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인터넷은 미국에 의해 주도된 구상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인터넷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의 통제를 받으며, 설계되고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95년 이후 국가 주도의 통신 정책이 수립 되면서 권력의 통제 아래서 인터넷이 형성되게 되었다. 정부는 한국통신의 글로벌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명분과 초고속 정보통신사업의 조속한 추진을 목표로 ‘정보화촉진기본법’을 제정한다. 그리하여 95년에 PC통신 서비스에 인터넷접속 서비스(일명 PPP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이때 설립된 규격화된 인터넷 구조의 기반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당히 잘 정비된 정보통신환경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인터넷이 국가의 강한 통제 아래서 그것의 주도하에 형성되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인터넷 구조의 상당 부분이 경제적, 그리고 그 경제 성장의 필수적 요소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인터넷은 그것의 형성기에만 정치적 경제적 조건에 귀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인터넷 환경을 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규제하는 수많은 법규범, 예를 들어 정보통신망법, 저작권법, 통신비밀보호법 등에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인터넷이 표현의 자유에 기반을 두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매체라는 평가와는 상당히 다른 매체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과연 인터넷이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실제로 무엇일까.

인터넷에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취지의 캠페인이 한 인터넷 사이트(http://internetforpeace.org)가 개설되면서 확산되었다. 그것이 작년 11월의 이야기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사)인터넷기업협회를 중심으로 이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다. 여기에 다음이나 네이버 같은 거대 포털 사이트가 동참하고 있다. 이들이 이 캠페인에 동참하며 낸 보도자료에는 인터넷이 “열린 의사소통과 민주주의 발전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포털 사이트야말로 열린 의사사통과 민주주의 발전의 저해가 되었던 인터넷 서비스 공급자 아닌가. 아무런 저항없이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고,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저작권 조항을 적극 홍보하고, 촛불관련 네티즌의 개인정보를 검찰에 제공하고, 불법적인 이메일 압수수색에 공모한 이들이 바로 그들 대형 포털 사이트였다. 이들이 옹호하는 인터넷은 무엇인가 의심스럽다.

인터넷,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기능과 위치를 점하는 매체다. 그럼 이제 환상에서 벗어나 좀 더 냉철하게 현재 우리에게 인터넷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지지하는 “열린 의사소통과 민주주의 발전” 말고, 좀 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달성케 하는 것은 인터넷이 아니라 네티즌, 그리고 우리들의 적극적인 자유에의 요구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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