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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의 종수와 ‘초록물고기’ 막동, 이유 있는 공감의 온도차[미디어비평]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8.05.20 12:21

이창동 감독의 2018년작 영화 <버닝>은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승화하고자 한다.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상징적 대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로 살아가야 하는 청춘의 슬픈 운명을 각인시킨다. 또한 영화 속 주인공 해미가 로망으로 여겼던 아프리카의 북소리를 연상케 하는 모그(mowg)의 OST는 '파주'라는 지역적 공간을 젊음이 방황하는 세계 그 어느 곳으로 정서를 확장한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정작 이곳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 청춘의 당대성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징성'이나 '존재론'이 분명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대의 청춘들이 너무나 상징적이고 수려해서 우리의 문학적 언어에 귀 기울이기 힘들 듯, <버닝>은 그렇게 대중과 교감하기 힘든 '순수 문학'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

<버닝> 그리고 <초록물고기>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영화의 러닝타임이 흐른 지 어언 한 시간여,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지금 이창동 감독이 만연체로 표현하고 있는 종수(유아인 분)와 해미(전종서 분)의 삶에 동시대 청춘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문득 이창동 감독을 문제적 감독으로 떠오르게 만든 작품 <초록물고기>가 떠올랐다.

느와르의 형식을 띤 영화 <초록물고기>는 <버닝>과 유사한 관계 구성을 보인다.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청년 막동(한석규 분), 그는 우연히 미애(심혜진 분)을 만나게 되고 그녀로 인해 그녀가 일하는 나이트클럽을 중심으로 암약하는 암흑가의 보스 배태곤(문성근 분)과 조우하게 된다. 미애를 소유하고자 하는 배태곤과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막동, 이들의 엇갈린 삼각관계는 결국 청부 살인의 비극적 결말로 끝맺는다.

1997년 그 시대의 부도덕한 부의 상징이었던 암흑가의 보스, 그는 시간이 흘러 2018년에 직업조차 모호한 벤(스티븐 연 분)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1997년에도 2018년에도 여전히 직업도 마땅치 않은,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청춘. 그 모습은 이제는 50대가 된 한석규에서 서른 즈음의 유아인으로 변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여전히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남자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성적인 희생양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의 존재도 대동소이하다.

16만 명으로 흥행성적만 놓고 보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초록물고기>는 1997년 올해의 좋은 영화로 선정되며 평단과 관객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한석규는 그 시대의 젊음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창동 감독의 다음 작품 <박하사탕>의 영호와 함께 막동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젊은이라는 점에 대중은 공감한다.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들였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던 그, 여전히 일산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한 가족 공동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는 배태곤으로 상징되는 '물신'의 세상에 무지했고 그래서 그의 시도는 생명을 담보한 무모한 실패로 되돌려졌다. <초록물고기>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피 흘리며 형에게 전화를 걸다 죽어가는 막동의 모습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십여 년, 군대를 제대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일자리라도 구하려던 청년은 윌리엄 포크너에 자기 동일시하는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역시나 온몸을 드러내고 홍보를 하는 아르바이트생이다. 나이트클럽 일에 청부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던 청년은 글을 쓰고 싶지만 무엇을 써야하는지도 모르는, 알바로 돈을 벌고 싶지만 세상의 강제를 견뎌내지 못하는, 무기력하지만 자존심만은 여전한 청년이 되었다. 그가 사랑한 해미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그녀가 사랑한 아프리카만큼이나 그녀의 삶 역시 모호하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이 그렇다. 1997년에 그리도 구체적으로 손에 잡혔던 청춘은 2018년이 돼서 무기력하고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알바를 하러 갔던 종수가 군대식 호명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모호한 건 감독 자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감독은 한 시간여에 걸쳐 장황하게 젊음을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하려 할수록 그 젊음은 추상적이었고 그 '추상'은 동시대의 실존과 어쩐지 '괴리'가 되는 느낌. 크로키로 그려내야 할 대상을 추상적 터치의 정물화로 그려낸 그런 느낌을 <버닝> 속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받는다. <초록물고기> 속 막동에게는 공감했지만, <버닝>의 종수는 2018년에 살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라기엔 막연하게 다가온다. 과연 종수가 자기 동일시했던 윌리엄 포크너, 그 추상적이고 모호한 존재에 공감하는 젊음이 얼마나 될까? 감독은 이 시대의 젊음을 그리려 했지만 정작 그 젊음들은 이창동 감독이 그려낸 젊은이에 공감할까?

<버닝> 그리고 <파주>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파주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기력한 젊음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나의 아저씨>를 통해 여운 깊은 연기를 보여준 이선균의 2009년작 <파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도 의문에 싸인 한 여인의 죽음이 있고 무엇인가 하기 위해 파주를 찾았지만 무기력했던 한 남자 중식이 있다.

박찬옥 감독의 2009년작 <파주>에서 파주는 이제 막 신도시 건설의 끝자락에서 파괴되어 가는 농촌을 그려낸다. 그곳에서 불륜의 관계로 엇물리는 세 남녀의 사랑은 결국 철거민 점거 농성장에서 '결자해지'의 연을 가지게 된다. 영화 <파주>는 흔들리는 청춘과 농촌에서 도시로의 변화되어가는 그 지점에서 해체된 관계를 통해 지역과 동시대의 청춘의 관계를 절묘하게 그려냈다.

그렇게 2009년에도 이미 도시로 진입되어 가던 파주는, 이창동 감독에 의해 발전되어 가는 일산에 밀린 폐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쇠락한 농촌의 정경으로 다시금 찾아온다. 쇠락한 농촌, 그곳에서 폐쇄된 관계 속의 부자는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 방치된 인간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이 시대의 청춘은 <초록물고기>에서 어떻게든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하려 안간힘을 쓰던 이도 아니요, <파주>에서 이제 막 도시로 진입되어 농촌처럼 자본주의 사회 그늘에서 그 그림자를 직시하려 고군분투하던 이도 아니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는 한층 더 발전했지만 그 시대의 발전에 방치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이다.

영화의 제목 <버닝> '태우다'는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흔히 인터넷상에서 열렬히 어떤 대상에 빠져있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종수는 하던 알바도 놔두고 문창과를 나와 하려던 창작 작업조차 딜레마에 빠진 지리멸렬한 상태다. 뜻밖에도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고향의 옛 여자 친구에게, 그리고 그녀와 함께 나타난 그녀를 소유한 듯한 의문의 남자에게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무의미한 삶을 반증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성'은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주제'를 매개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버닝> 역시 마찬가지다. 종수는 빠져들지만 벤은 빠져들지 못하는 그 '여성'이 무기력했던 종수를 전사로 깨어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선택은 폭발적이지만 동시에 종수란 존재를 증명하기엔, 또한 그의 행동이 벤이라는 대상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정죄로 보기엔 우발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단말마적 그의 버닝은 무기력했던 그의 존재와의 연관성에서 우연히 나타났던 벤만큼이나 피상적이다.

<버닝>, 그리고 <리턴>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초록물고기>라는 작품을 오래도록 회자되도록 만든 건 막동이란 청춘을 더욱 안타깝게 만든 조폭 보스 배태곤의 존재다.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거침없이 제거해 버리는 이 존재의 무참한 악이 그 맞은편에 있는 선량한 막동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버닝>에서 그 역할을 하는 건 스티븐 연이 분한 벤이다. 그는 직업조차 알 수 없지만 강남의 빌라에 살며,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대마초를 스스럼없이 피우고 폐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가진 이 시대 '부도덕 혹은 탈도덕의 상징'. 그런데 어쩐지 벤으로 그려진 이 '악의 축'이 새삼스럽지 않다. 파괴적이지도 않다.

얼마 전 종영한 SBS의 <리턴>에서 벤 저리 가라 할 재벌가 혹은 유력 명문가 자제들의 도덕적 아노미가 '진수성찬'으로 나열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리턴>을 들 것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TV 드라마 그리고 종수 역의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연기했던 조태오를 대표로 하여 빈번하게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연장'이다. 그런 면에서 <버닝>은 우리 사회에서는 새롭지 않은 부도덕한 가진 자, 그 가진 자에 의해 농락당하는 여자, 그녀를 사랑했던 순진한 남성의 삼각관계 재연이라는 점에서 '서사'적 신선함을 접고 들어간다.

<버닝>, 그리고 <시>

영화 <버닝> 스틸 이미지

하지만 서사의 진부함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의 빼어남으로 얼마든지 상쇄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부도덕한 가진 자들을 악의 축으로 한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창동 감독은 어쩌면 뻔한 이 사회의 부조리한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청춘의 고뇌를 잘 구현해 냈을까?

그 지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전작 <시>가 떠오른다. 노인의 처지에 버텨내기 힘든 일을 하면서도 손주를 키워가는 할머니 미자(윤정희 분)가 시를 배우며 느끼게 되는 '세상에 대한 자각'이 뜻밖에도 마주하게 된 현실을 영화는 담담하게 그래서 더 처연하게 승화시켰다. 할머니의 현실, 손주의 상황은 구체적이었기에 할머니가 만난 시를 통해 깨달은 자각의 세계는 더욱 처절했다. '안다', '깨닫다', '보다'라는 '인문학적 사고'가 만난 '자각'과 '책임'의 묵직함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설명해 낼 수 있었을까.

한 소도시에서 벌어진 청소년들의 부도덕한 사건으로 비롯된 할머니의 슬픈 결말은 할머니가 처한 상황의 구체성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그러기에 2018년 <버닝>으로 돌아온 이창동 감독이 어쩐지 아쉽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통해 표현해 내고자 했던 상징을 이해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감독이 그려낸 그 상징이 미자 할머니가 살았던 현실에 가닿았던 <시>와 달리 2018년 청춘의 현실에서는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학적'인 우리 문학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쉬이 회자되지 않는 것처럼 상징으로 점철된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낯설지 않은 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치정극은 그 집요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쉬이 다가서지지 않는다.

<시>의 상징이 대중과 잇닿지 못해 안타까웠다면 <버닝>의 상징은 대중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여겨진다. 서른의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이지만 마치 저기 90년대나 80년대에서 시간 여행을 온 여행자 같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하루키처럼 사는 건 아니다. 본의 아니게 전투에 떠밀려온 몇 포의 젊은이들에게 종수의 전쟁은 사치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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