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생방송을 앞두고 스튜디오에 무단 침입해 담당 PD에게 “인터뷰 대본 보러왔다”며 대본 제출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서울 양천경찰서 고문 파문 사건과 관련해 “경찰의 실적주의”를 지적하며 경찰 내부를 비판했던 채수창 전 강북경찰서장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본부장 이근행) 민주언론실천위원회는 9일 보도자료를 통해 생방송을 앞두고 인터뷰 대본 제출을 요구했던 경찰의 행태를 낱낱이 밝혔다. MBC노조는 “언론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방송의 독립성을 현저하게 위협하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도발”이라고 비난했으며, 라디오PD들은 공개 사과를 요구했다.

▲ MBC 라디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홈페이지 캡처
입증 없이 스튜디오 안까지 들어가 대본 요구

MBC노조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생방송을 5분 앞둔 오후 5시55분쯤. 프로그램 담당 김 아무개 PD의 자리로 서울경찰청 정보 2분실 소속 박 아무개 경위가 전화를 걸었다. 이날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는 채수창 전 강북경찰서장과 전화 인터뷰가 예정돼 있었다.

박 경위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이날 방송에 “채수창 서장이 출연하느냐” “언제 나오느냐”고 담당 PD에게 물었다. 이에 담당 PD는 “도대체 왜 그러시느냐, 지금 생방송 준비로 정신이 없다”며 “핸드폰 번호를 주면 방송 후 연락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이후 PD는 담당 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한 뒤, 생방송 진행을 위해 5스튜디오로 향했다.

김 PD가 5스튜디오 부조정실에 도착했을 때, 박 경위는 이미 그 곳에 있었다. 박 경위는 PD를 향해 “채수창 전 서장 인터뷰 대본을 보러왔다”며 질문지 제출을 요구했다. 이에 PD는 “인터뷰 질문지는 우리 심의실에서도 미리 보는 경우가 없다”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후 담당 부장이 스튜디오에 도착, 박 경위를 향해 “생방송 스튜디오는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이라며 나갈 것을 요구했고, 결국 그는 나갔다.

이날 박 경위는 MBC 출입증을 끊지 않고,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 무단 침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MBC를 담당하는 경찰 소속 정보관, 경위 등은 MBC 1층 로비와 주차장 등을 자주 방문하긴 하지만, 사원증 혹은 출입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MBC내부는 들어가지 않는다. 당시 박 경위는 1층 안내데스크에서 담당 PD에게 전화를 했고, 이후 안전관리부 직원들에게 “담당 PD를 만나러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박 경위와 안면이 있는 안전관리부 직원들은 “담당 PD와 약속이 돼 있다”는 것으로 알고 안내해 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라디오PD들 대응책 논의하자 MBC 방문해 사과

▲ 서울 여의도 MBC 사옥 ⓒ미디어스
라디오PD들은 9일 오전 11시 긴급 간담회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후, 라디오PD들의 움직임을 파악한 경찰 쪽은 논란이 커질 것을 우려, 담당 PD 등에게 전화를 걸며 부단히 움직였다. 그리고 오후 3시, 서울경찰청 정보 관리부장과 박 경위 등은 MBC를 방문, 서경주 라디오 본부장과의 면담 자리에서 사과했다.

이 자리에서 서경주 라디오 본부장은 “언론기관에 들어와 생방송 질문지를 보자고 한 것은 중대하고 엄중한 사건이다. 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에 비견될 만한 일”이라며 “회피하거나 무마하려고 하면 사안이 악화될 것이다. 서울경찰청장이 공개적,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경찰은 “스튜디오까지 간 것은 잘못된 일이다. 사과한다”면서도 “하지만 사찰이나 사전 검열은 아니다. 그저 알고 싶은 내용이 있어 찾아갔으나 무리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무단 침입해 인터뷰 대본 제출 요구, 군사독재 시절에도 없었다”

라디오PD, MBC노조 등 MBC 구성원들은 “사상 초유의 충격적인 사건”이라며 경찰의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MBC노조는 이에 대해 “사상 초유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며 “경찰이 생방송 스튜디오에 무단으로 침입해 담당 PD에게 인터뷰 대본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한 일은 군사독재 시절에도 없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MBC노조는 “소위 ‘출입 기관원’을 파견해 방송사를 제 집 드나들듯 하며 각종 정보를 캐고, 보이지 않는 압력을 행사해 온 권력기관의 ‘사찰’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라며 “이런 잘못된 관행을 뿌리 뽑아도 모자랄 판에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돼 있는 생방송 스튜디오에 들어와 인터뷰 대본까지 내 놓으라고 요구하다니, 이는 언론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방송의 독립성을 현저하게 위협하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라디오PD들은 “이번 사건의 총 책임자인 서울 경찰청장은 국민 앞에 그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공개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또 “이번 일은 일개 경찰 기관원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이뤄질 수 없다”며 “누가 이번 사건을 지시했는지 철저히 조사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자를 문책하라. 경찰은 물론 권력기관의 방송사 ‘사찰’ 관행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근본적인 재발 방지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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