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수현 기자] 방송제작현장의 계약직 및 프리랜서 스태프가 성폭력을 경험한 비율이 90%에 육박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성폭력 가해자의 47%가 방송사 소속 임·직원, 35.7%가 방송영상제작사 소속이거나 계약관계를 맺은 임·직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간극이 큰 방송계인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8일 오전 서울 민주노총에서 방송계갑질119, 방송스태프노조 준비위원회 주최로 '2018 방송제작현장 성폭력 실태조사' 발표가 열리고 있다(연합뉴스)

방송계갑질119와 방송 스태프 준비위원회는 18일 ‘2018 방송제작현장 성폭력 실태조사’ 기자 회견을 주최했다. 방송계갑질119의 김유경 노무사는 “방송제작현장 안에서 프리랜서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처럼 이야기된다”며 “하지만 이는 갑을관계를 포장한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언제라도 해고될 수 있는 방송계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이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만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조사한 설문조사 결과에는 방송계 성폭력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2월 14일부터 3월 2일까지 방송 스텝 223명(▲남성 14명, 여성 209명 ▲방송사 및 제작사 정규직 6명, 계약직 및 프리랜서 216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에서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밝힌 응답자는 89.7%에 달했다. 이는 여성가족부가 2015년 실시한 성희롱실태조사 결과(6.4%)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였다. 당시 여성가족부의 대상 업종이 50인 이상 공공기관과 민간사업체인 것을 고려할 때 방송계에서 비정규직 스텝을 향한 성폭력이 만연한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성폭력 유형(복수응답)으론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 70.4% ▲음담패설 및 성적 농담 57.8% ▲회식에서 술을 따르거나 옆에 앉도록 강요하는 행위 49.3% ▲포옹, 손잡기, 신체 밀착 등의 신체 접촉을 하거나 이를 강요하는 행위 43.9% 순으로 높았다. 특히 이런 성폭력 행위자에 방송사 소속 임·직원이 47%인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사 정규직 직원이 계약직·프리랜서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방송제작환경 특성에서 권력형 성폭력이 벌어지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방송제작현장에서 권력형 성폭력이 벌어진다는 것은 피해자가 성폭력을 대처하는 방법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피해자 중 80.4%는 ‘(성폭력을 당한 후)참고 넘어간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는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 가 55.8% ▲고용형태 등 신분상의 열악한 위치 때문에 가 57.7% ▲소문 평판 등에 대해 두려움 때문에 가 44.2%로 나타났다.

프리랜서·계약직 직원이 다음 작업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방송사 정규직 직원의 평가, 인맥 등인 것을 고려했을 때 성폭력 피해자들이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분위기인 것이다. 실제 성폭력을 당했다고 응답한 194명 중 사내 창구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사례는 4명에 불과했다.

설문조사에서 피해자들이 밝힌 사례는 더 충격적이다. 설문조사에는 ▲회식 자리에서 술 따르는 여자 취급하는 PD, 술 취한 작가 손을 끌고 모텔로 간 국장, 노래방에서 발라드 노래를 핑계 삼아 끌어안으려고 한 CP ▲함께 가는 택시 안에서 신체적 접촉을 한 PD ▲회식 자리에서 50대 중후반 공중파 PD가 작가에게 신체적 접촉을 했지만 아무런 징계가 없었던 사례 등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박선영 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방송업계에서 개인에 대한 능력 평가는 자의적”이라며 “권력자가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성폭력 피해자가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전형적인 권력형 성폭력”이라고 강조했다.

방송 제작 현장. 본 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연합뉴스)

방송계갑질119와 방송 스태프 준비위원회는 방송계의 성폭력 원인으로 ▲프로젝트 단위로 고용이 성립되어 차기 고용 여부가 개인적 관계에 얽혀있고 ▲비정규직 형태로 종사하는 비율이 매우 높으며 ▲외주 제작 비중이 높지만, 비정규직 근로자가 방송국 소속 관리자에게 종속적인 관계에 있을 경우가 빈번한 것을 꼽았다.

또한 이를 개선하기 위해선 ▲공동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시행 ▲성폭력 신고센터 설치 ▲성폭력 관련 지침 강화 ▲각종 행정권한과 연계해 성폭력 예방 정책 실효성 강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종합대책에 부정적인 응답자가 많았다”며 “정부는 방송계의 특수성을 반영한 성폭력 교육이나 신고센터 구성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여러 대책이 행정 권력과 결합해 실효성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선영 선임연구원은 프리랜서가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선영 연구원은 “가사 도우미의 경우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며 “최근 특별법을 만들어 가사 도우미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런 게 방송계에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방송계 프리랜서는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데 성폭력 문제에 한해서라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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