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주 전 의원의 성추행 의혹을 둘러싼 혼란은 정봉주 전 의원 스스로가 의혹 당일 카드 사용 내역을 발견하고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 입장을 밝히면서 마무리 됐다. 정봉주 전 의원은 애초 의혹을 보도한 프레시안 등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지만 프레시안 측이 정봉주 전 의원을 고발한 건이 있고 ‘무고’ 등의 문제도 따져야 하는 문제 역시도 남아있다.

‘나쁜 사람’을 찾아내 벌을 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이 사건을 다룬 언론의 태도 문제가 그렇다. 나 자신이 프레시안과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이들보다 나은 대응을 할 수 있었을까를 자문해보면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프레시안이 처한 상황은 그만큼 까다로웠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대목이 일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해놓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프레시안이 언론의 성범죄 보도에서 고질적으로 드러나는 피해자 신상 노출 등 문제에 많은 고려를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초기 보도의 과정에서 피해자와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관계에 이목이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쉽다. 여러 현실적 고려가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적어도 개인적 관계의 문제를 지적받지 않을만한 다른 기자가 기사를 작성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정봉주 전 의원이 이 문제를 악의적으로 거론하면서 문제의 핵심은 언론의 의혹 제기에 정봉주 전 의원이 답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및 친구들’과 정봉주 전 의원이 대결하는 구도인 것처럼 호도됐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프레시안이 피해자의 입장문 전문을 그대로 싣는 방식을 택한 것도 고민을 남긴다. 피해자 입장의 가감 없는 전달이 필요했다면 인터뷰 등을 진행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인터뷰 기사에서는 인터뷰이의 개입과 이를 통한 게이트키핑이라는 최소한의 저널리즘적 작동양식이 보장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봉주 전 의원이 27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관련 의혹 제기로 기소됐던 사건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힌 후 정론관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의 문제가 난제를 풀기 위해 기꺼이 나선 자의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의 문제는 ‘태만’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한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정봉주 전 의원이 의혹 당일 자신의 동선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780여장의 사진 등을 다룬 이후 ‘폐지’ 논란에 휩싸인 상태다. 스스로를 “특수관계인”이라고 부르는 김어준 씨가 자기 친구의 곤경을 구하기 위해 공중파를 사유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SBS를 김어준 씨가 소유하고 있거나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김어준 씨 혼자서 만들고 있는 건 아닌 만큼, 이런 비판은 절반의 진실만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정봉주 전 의원 사건을 총체적 본질적으로 다루지 않고 일부 쟁점만 제한적으로 다룸으로써 편향적 역할을 스스로 떠안게 됐다는 점이다. 한겨레는 이후 인터넷판 기사를 통해 SBS 방송을 통해 공개된 사진들이 보여주는 당일 동선과 정봉주 전 의원의 기존 해명이 충돌한다는 지적을 내놓았는데, 이는 사실 SBS 방송이 이미 했어야 했던 일이다. 정봉주 전 의원의 병원 방문 시간대가 언제였는지를 확인할 단서가 780여장의 사진 가운데 있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는 SBS 스스로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SBS는 <김어준의 블랙하우스> 29일자 방송 직전 내보낸 자막을 통해 “논란이 된 특정 시간대에 대한 사실 확인에 집중했을 뿐 사건 전체의 실체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결과적으로 진실규명에 혼선을 야기했다”며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제작 관련자 교체, 책임자 징계 등 조치를 약속했다.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김어준 씨와 정봉주 전 의원의 관계만큼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형식’ 그 자체였다고 볼 수 있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분류 안에 스스로를 위치시켜 놓고 있지만 요즘 유행하는 말로 본다면 ‘시사예능’에 가깝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희극인인 강유미 씨가 취재원을 따라다니며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고 묻는 장면이 호응을 얻은 것 등을 보아도 그렇다. 이 부분은 시청자들의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가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거나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어떤 ‘정파성’을 공유하는 즐거운 경험을 하는 것에 맞춰져 있음을 보여준다.

‘시사예능’이라는 형식은 종편을 시작으로 해서 몇 년 전부터 크게 유행하고 있다. 요즘은 언론이 ‘시사예능’의 소재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에서 나온 ‘셀러브리티’의 발언이 곧바로 언론의 기사거리가 되는 일종의 분업과 같은 풍토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시사예능’이 다루는 여러 평론은 언론이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이미 소화했어야 하는 것들이다.

시사가 예능이 된 시대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결국 ‘진실’이 냉소의 대상이 된 현실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이 느끼기에 언론은 더 이상 진실을 구하려 노력하는 존재가 아니다. 앞에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스스로 정파적 음모에 가담해 사익을 추구하는 게 언론의 ‘민낯’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실’을 그 자체로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 그저 웃고 떠들고 비웃는 것이라는 게 ‘시사예능’이란 존재의 전제가 아니겠는가.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정봉주 전 의원이 자신을 향한 의혹 제기에 “낙선을 목적으로 한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정봉주 전 의원과 같은 정치인이 이런 프레임으로 자신의 곤경을 빠져 나가려 늘 시도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믿음 역시 나날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투’의 배후에는 공작과 음모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와 ‘시사예능’의 문제, 그리고 프레시안이 처한 곤경이 조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봉주 전 의원 성추행 의혹을 둘러싼 여러 논란은 우리 공동체가 이 함정을 벗어나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해결책은 정치와 언론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신의성실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첨예한 문제를 공적으로 다루기 위한 도구 혹은 틀을 ‘저널리즘’이란 형태로 갖고 있다. 물론 저널리즘이 언제나 엄격 진지 근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언론도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널리즘의 문법 내에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다는 이유로 팔짱끼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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