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도우리 객원기자] 펜스 룰(pence rule). 성폭력이 일어날 소지를 없애기 위해 아예 남성과 여성을 격리하자는 규칙이다. 미투 운동이 이어지자 성폭력 대안 중 하나로 나왔다. 새로워 보이지만 ‘남녀칠세부동석’의 다른 버전이다. 종교 시설에서의 여신도와 남신도의 공간 분리, 남녀 사이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격언 등 우리 사회에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가치관이다. 즉 펜스 룰은 일종의 성 보수주의다. 성 보수주의는 성폭력 위험을 줄이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SBS)

성 보수주의, 약자 섹슈얼리티 단속하는 수단

성 보수주의는 기존의 섹슈얼리티·젠더 문화를 보수(保守)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성 문화는 어떠한가? 남성들이 포르노 소비와 성매매를 쉽게 할 있고, 술자리나 카톡방에서 여성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난무하는 문화다. 축첩 제도, 남성의 성 경험은 자랑거리가 되는 등 남성의 성적 자유와 방종만 과도하게 존중하는 문화다. 결국 성 보수주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남성 중심적이며 이성애 중심적 성이다. 이러한 성을 지키려면 양성애자, 레즈비언, 게이의 성을 불결하고 비정상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 보수주의는 전통적으로 가해자들보다 여성을 비롯한 약자의 성을 단속하는 수단이 되었다. 대표적 사례가 순결주의다. 과거 강간을 당해도 강간 가해자를 단죄하기보다, 여자가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결혼하는 일이 흔했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더럽혀졌다’는 낙인 때문에 고발을 망설인다. 펜스 룰이 남초 직장 내 여성들의 고립, 승진 및 채용 배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언론 보도도 마찬가지다. 성 보수주의는 기득권의 성만 ‘지킬’ 수밖에 없다.

성 보수주의, 성차 부각·재생산 수단

성 보수주의는 성폭력이 성적 자기결정권 존중의 문제가 아닌 남녀 사이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이는 상대를 사람 자체보다 성적인 특질을 더욱 의식하고 부각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펜스 룰을 주장하는 것은 이성을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지 못한다는 미숙을 입증한다. 남녀 구별에 대한 인식 없이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안다면, 굳이 펜스 룰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성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성보다 같은 남성, 여성끼리 더 다를 수 있다. 계급, 인종 차이가 더 클 수 있다. 게다가 군대 내 성폭력처럼 동일 성별 내 성폭력 문제를 간과하게 만든다. 나아가 성별 분리는 집안일은 여성의 일이며 정치는 남성의 업무라는 등 남녀에 다른 역할과 특질이 존재한다는 가치관을 확대 재생산한다.

(연합뉴스)

미투 운동, 약자 중심의 성 해방되어야

미투 운동은 남성 중심적 성 구조의 폐해를 고발하고 개선해나가려는 운동이다. 그래서 기존의 폭력적이고 상대 의사를 살피지 않는 관계를 반성하고, 남성 중심주의 성 문화는 물론 이성애 등을 넘어서는 섹슈얼리티·젠더를 논의하는 장으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전형적인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성적 상상력, 새로운 ‘야함’이 꽃피는 성 해방이 되도록 해야 한다. 분명히 해 둘 것은, 기존에 남성들이 쉽게 섹스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성 해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저서 ‘남자마음설명서’처럼 남성의 성욕에 대해 무한정 긍정하고, 여성이 적재적소에 남성의 눈요깃거리가 되어줘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성 해방이 아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돼지발정제 모의 에세이처럼 성적 자기결정권을 무시하는 행위가 철없는 짓으로 치부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성 해방이 아니다. 대학가 단톡방 성희롱 사건에서처럼 성적 대상화가 ‘호기심’으로 퉁쳐지는 의미에서의 성 해방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해방은 여성에게 고통일 뿐 아니라 남성성 비하이자 망신이다.

성적 대상화를 멈추고 상대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동의 여부에 기민해지는 것. 이 토대 위에서 더 새롭고 짜릿한 방식의 성적 자유와 유혹을 풍족히 누리는 것. 미투 운동이 이러한 차원에서의 성 해방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성 보수주의를 부추기는 펜스 룰은 섹슈얼리티를 가두는 울타리(fence)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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