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대북 특사를 파견하기로 한 이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과의 대화 의사를 밝히는 듯한 언급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이 대화 의사를 밝혔고 자신도 김정은과의 직접 대화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치광이와 협상하는 리스크는 김정은이 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발언의 의도를 두고 여러 해석이 쏟아진다.

공통된 지적은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그리다이언 클럽(Gridiron Club) 연설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다이언 클럽은 일상적으로 유지되는 권력과 언론이 그동안 쌓인 갈등을 푸는 기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워싱턴 언론인들이 개최하는 모임이다. 그 역사가 약 130년이나 됐다. 미국의 대통령은 평상시 언론의 날선 비판에 대한 나름의 답을 이 자리에서 자기비하적 유머 등으로 내놓는 게 전통이다. 미국의 정관계에선 그리다이언 클럽 외에도 이런 성격의 자리가 종종 열린다. 언론이 정치권력과 결탁해 파벌의 한 켠을 차지하고 사생결단식 싸움만 일삼는 우리 현실에서는 부러운 부분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엔 이 모임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올해는 전임 대통령의 예에 따라 출석해 언론의 비판에 대한 농담을 했다. 최근 호프 힉스 백악관 공보국장이 사임한 일 등에 대해 “다음은 멜라니아인가?”라고 한 것과 존 켈리 백악관 비서실장에 의해 기밀 취급 권한이 강등된 사위 재러드 쿠슈너에 대해 “쿠슈너가 신분확인을 통과하지 못해 이 자리에 늦었다”고 한 것 등을 보면 맥락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발언도 과장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제는 과장이냐 아니냐 보다는 과장의 방향이다. 이 자리에서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농담’의 정도와 그 소재가 되는 사건의 범위로 볼 때 그리다이언 클럽 연설도 내용도 참모진과 면밀히 조율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북한에 대한 군사옵션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농담이 아니라 ‘대화’를 전제한 농담이 나온 맥락이 나름대로는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백악관은 ‘비핵화’를 전제한 북미대화를 강조해왔는데, 이 농담으로 여전히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최근 북핵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특징은 위협과 희망이 동시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 예방타격, 코피작전 등의 가능성을 높이면서도 동시에 대화 가능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북핵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애초 트럼프 행정부가 대북문제에 대한 원칙으로 제시한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maximum pressure and engagement)’라는 말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최소한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압박’과 ‘관여’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게 아닌 듯 보인다. 압박을 통해 관여하고 동시에 관여를 통해 압박을 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이런 특성을 남북관계 개선이 북미관계 개선으로 이어지고 다시 이를 바탕으로 남북관계의 개선을 이루는 선순환을 조성하기 위한 바탕으로 삼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5일 방북하는 특별사절단이 이후 그대로 미국에 가기로 한 것은 나름의 ‘묘수’라고 볼 수 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연합뉴스)

대북특사단은 서훈 국정원장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투톱체제라고들 한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가장 믿는 인사라는 윤건영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역시 포함됐다. 북한이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보내온 고위급 특별대표단과 비교해 볼 때 북한의 이른바 국가 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제외하면 대략적으로 급을 맞춘 인사 구성인 셈이다.

대북특사단의 최대 임무는 북미대화가 가능한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이 기회에 ‘비핵화’에 관한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결코 쉽지 않다. ‘비핵화’라고 쉽게 말하지만 북한이 이에 대한 어떤 약속을 어떻게 한 것인지를 놓고 해석이 분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은 특사단이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대북특사단이 모색할 수 있는 현실적 대응은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제시한 ‘핵 동결을 입구로 하고 비핵화를 출구로 하는 대화’의 모양새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김정은이 핵 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에 대한 동결 의사를 밝히도록 해야 한다. 북한은 이의 반대급부로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중단이나 축소, 연기 등을 요구할 것인데 이는 최근까지 미국의 태도로 볼 때 실질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한미군사훈련의 축소 등은 북미대화를 일단 궤도에 올려놓은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점을 설득해야 하고 다만 미군의 전략자산 전개 등의 문제에서 조정 가능성을 찾는 방식으로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김정은이 이에 대한 최소한의 의사 표시를 한다면 이를 밑천으로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김정은의 의사 표시가 진정성 있는 북미대화의 재개를 희망하는 명확한 징후이므로 일단 대화 테이블을 열어 북핵 문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후 북미대화의 과정에 따라 목적과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최소한의 범주 내에서 한미군사훈련의 조정이 가능하다는 합의 또한 이뤄낼 필요가 있다.

‘협상’에 특별히 예민한 트럼프 행정부에게 이번 방북의 결과로 추가적인 ‘당근’을 제공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조선일보 등이 북한에 억류 중인 한국계 미국인 3명을 석방하는 문제를 특사단이 북한과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한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송환된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사례 등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 사건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접근에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북한이 특사단 방북을 계기로 한국계 미국인 3명을 석방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이 문제를 또 다른 일종의 ‘협상카드’로 쓰려 한다면 문제는 더 꼬일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일종의 인질협상 국면이 된다면 미국으로서는 강경하게 나가지 않을 도리가 없고 그럴 경우 북미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대목과 관련한 북한의 태도를 제어하는 것 또한 특사단이 맡아야 할 임무일 수 있다. 청와대는 이와 관련한 보도에 대해 “그 문제를 논의 안 한다고 100% 장담할 수는 없지만 주제가 아닌 것은 맞다”고 했는데 이런 부담을 감안한 반응으로 풀이된다.

이런 복잡한 임무를 짊어진 특사단은 오후 2시 성남공항을 통해 북한으로 출발할 계획이다. 미리 성과를 예단해서 자축할 필요도 없지만 굳이 실패를 기정사실화할 시점도 아니다. 청와대는 이번 한 번의 방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적어도 문제 해결의 시작점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성과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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