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갈수록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기도 하고, 익숙함과 식상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라는 표현도 있지만 하나의 스타일로 당대 최고 스타의 자리를 호령하고 있는 이에게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미세한 타격폼 교정 하나로도 하루아침에 슬럼프로 떨어져버리기 십상인 야구선수처럼,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자라는 스타에게 그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무기를 바꿔보라는 충고는 어쩌면 달콤하지만 위험천만한 유혹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무한도전은 이런 민감한 요구를 거침없이 해버렸습니다. 그것도 자신들의 프로그램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예능계의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MC 중 한 사람인 유재석을 상대로 말이죠. 비록 달력 특집이라는 익숙한 포맷 속에서 취한 변화인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 그리고 매달 변하는 컨셉을 소화시키는 간접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그의 현재 모습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프로그램은 없었어요. 모두 그의 능력에 편승하거나 안주하기만 했을 뿐이었고, 이런 소극적이지만 안정적인 방식은 그 나름의 흡족할만한 성과물들을 거둔 것도 사실이었거든요.

선한 인상, 남을 배려하는 진행 방식, 긍정적이고 양보하는 이미지라는 유재석이라는 이름이 포함하고 있는 가치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일부러 얻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가 지금껏 진행해왔던, 그리고 수행해왔던 경험들이 시청자들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형성된 매우 강력한 연계의 끈인 셈이죠. 개인 생활은 물론이고 한 번의 실수에도 무너질 수 있는 양날의 칼이지만 누구나 부러워하는 압도적인 호감덩어리. 유재석이란 이름은 이젠 단순히 잘 웃기는 유능한 진행자의 범주를 넘어선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 있습니다.

헌데 200회가 넘는 각종 고생의 순간을 함께 하면서 그런 선한 유재석을 만들어준 일등공신인 무한도전은 이제 그의 이미지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모습에 좀 더 다양한 색을 덧입히고자 하는 것이죠. 저출산 방지 포스터 컨셉의 특별 심사위원으로 초빙된 이승연의 말처럼 그야말로 정답이지만 너무나 익숙하고 뻔한 유재석이라는 공식에 무언가 다른 의외성을 첨가하고 싶었던 것이에요. 이런 요구는 달력 특집의 두 번째 방송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보여주면서 이중적인 매력을 시도해본 것이죠.

사실 이번 시도가 유재석과 정말 착 달라붙는 일체감을 보여주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름의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제겐 모호한 중성미를 내뿜는 유재석이나 차를 향해 힘찬 해머 질을 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했으니까요. 차라리 미숙한 MC 장연주의 서툰 모습을 챙겨주며 주위의 리액션을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MC로서의 유재석이 훨씬 더 익숙하고 편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에요. 그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은 역시 1인자로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전 이런 시도가 몹시 흥분되고 멋져보였습니다. 유재석 뿐인가요? 갑자기 회춘한 박명수나 입을 다물고 있으니 일류 모델의 포스를 내뿜는 노홍철의 모습도 일품이었죠. 집중력을 보여주는 정준하나 정형돈의 성실함도 좋았고,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길과 하하의 발전을 기대해볼 수 있는 자리기도 했구요. 무한도전과 함께한 그 긴 시간동안 모두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캐릭터를 다 소진해버린게 아닌가 하는 우려 따위는 그들이 조금씩 내뿜는 의외성과 함께 사그라져 버렸거든요.

네. 굳이 전문가들의 요구대로 완전히 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끔씩 자신들에게도 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언제든지 선보이며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것만을 보여주어도 충분해요. 많은 사랑을 받는 장수 프로그램일수록, 최고의 자리에 오래 머물며 대중들에게 노출 빈도가 심한 스타일수록 필요한 새로움의 에너지를 무한도전은 이런 방식으로 충전해버렸습니다. 출연진들의 이미지 개조도 하고, 그 과정을 통해 웃음과 재미도 주고, 그 결과로 기부까지 하다니 이런 탁월함은 정말 다른 이들이 따라갈 수 없는 무도만의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정말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아요.

'사람들의 마음, 시간과 공간을 공부하는 인문학도.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민심이 제일 직접적이고 빠르게 전달되는 장소인 TV속 세상을 말하는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소통하는 통로' - '들까마귀의 통로' raven13.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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