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27일 박근혜 전 대통령 결심공판에서 징역 30년과 벌금 1185억원을 구형했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는 이날도 서초동에 모여 세를 과시했다. 재판을 방청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검찰이 구형량을 밝히는 동안 고성을 지르며 소란을 피웠고 국선변호인이 눈물을 흘리며 선처를 호소할 동안 함께 눈시울을 붉히는 여전히 충성스런(?) 모습을 보여줬다.

검찰이 꺼낸 형량 자체에 대해선 “사형보다 잔인하다”고 한 자유한국당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정치세력들이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내려질 실제 선고에 대해선 어떨까?

대부분의 언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최순실 씨의 경우 보다 높은 형이 선고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을 맡고 있는 재판부가 최순실 씨와 정호성 전 비서관 관련 사건도 담당했기 때문에 각 사안에 대한 유무죄 판단은 달라지기 어려운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앞서 두 명과는 달리 대통령이라는 직책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면 결국 최순실 씨가 1심 판결에서 받은 징역 20년과 검찰이 구형한 징역 30년 사이에서 형량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올해로 66세이므로 만기출소 할 경우 90세에 가까운 노인이 된다. 그 사이에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감옥에서 여생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선거라는 신성한 과정을 거쳐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권력을 사사롭게 사인에게 넘겨주고 그가 사익을 추구하는데 협력한 헌정 유린 행위의 대가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검찰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결심 공판에서 징역 30년·벌금 1천185억 구형한 27일 오후 서초구 법원삼거리 인근에서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석방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이 남긴 충격으로부터 한국 사회가 벗어나기 위해선 이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큰 과제는 대중이 냉소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치가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냉소적 인식을 인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정치에 대한 냉소적 인식이란 정치인이 말하는 가치나 명분은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르-K스포츠재단 문제가 언론에 본격적으로 보도되기 전까지 최순실 씨 문제는 정치권의 대표적인 ‘음모론’에 불과했다. 특해 최태민 씨와 박근혜 전 대통령 간의 관계에 대한 여러 풍문들은 정적들의 흑색선전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보니 그간의 ‘억측’들은 다소 과장된 부분은 있을지라도 큰 줄기는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100% 대한민국이나 경제민주화, 창조경제,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문화융성은 모두 최순실 씨의 사익추구를 가리기 위한 위장막으로 활용됐다. 전무하고 아마도 후무할 숫자의 사람들이 심지어 가족단위로 촛불시위에 나온 것에는 ‘음모론’이 ‘현실’이 됐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최근 가상화폐 문제나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문제 등에서 젊은 세대가 기성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을 보여준 맥락에는 이미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정치의 본질이 확인됐다고 믿는 심리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정서가 지금은 기성언론을 통해 ‘2030세대의 공정성에 대한 요구’로 표현되고 있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치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통해 형성된 대중의 원한감정(ressentiment)이 개별 사건과 호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정서는 앞으로도 다양한 사건을 통해 또 다른 형태로 지속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대안적 정치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흐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문제인 셈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런 순간에 정치는 대개 미봉적 해결책을 제시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대중의 원한감정을 다시 키우는 악순환을 되풀이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과거 군부독재로 표현되는 억압적 전체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조합해 대응한 사례 등이 그렇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카노 고이치 조치대학 국제교양학부 교수는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란 제목의 책에서 이런 현상을 정확히 짚었다. 이 책에서 조명하는 일본 정치의 극우화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일본열도개조론’으로 대표되는 ‘이익으로 뭉친 기득권 정치’에 대안을 자처하는 정치가 보통국가화와 신자유주의를 조합한 ‘개혁’으로 대응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요구는 일관되지 않고 갈지자를 보이는 듯 했는데, 이는 미봉적인 정치의 대응으로 일어난 현상이었을 뿐이라는 게 나카노 고이치 교수의 견해이다. 이를 통해 일본 정치는 마치 축이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는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리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우경화를 향해 계속해서 움직여왔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근본적 문제의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가 등장하지 않는 한 아베 신조 총리가 어떤 계기를 통해 실각한다고 해도 이 흐름은 계속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나 이에 앞서 유럽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정당의 사례 역시도 통치의 실패로 형성된 대중적 원한감정을 정치가 대안적 방식으로 다루지 못하고 기성 정치가 오직 미봉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방식의 극우정치마저도 동력을 상실했을 때, 다른 대안이 없는 경우 대중의 원한이 선택할 결과가 무엇일지는 상상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현재 시점의 한국에서 이 ‘미봉적 정치’의 선두에 서있는 세력은 자유한국당인 것 같다. 문재인 정권에 무조건적으로 ‘종북’의 혐의를 덮어씌우고 미투운동을 “진보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전형적인 냉소주의 서사로 포장하며 그 결과로 정치를 ‘똥 묻은 개와 또 다른 똥 묻은 개’의 대결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정치는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며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반대편에서 오직 자유한국당을 ‘괴물’로 묘사하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정치의 미봉적 대응이란 숙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정치에 관여하는 주체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이런 식으로는 앞서 예로 든 좌우로 흔들리며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진자의 신세를 벗어날 수가 없다. 대안적 정치는 진자의 축 자체를 이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가 사회적 문제의 근본모순을 우회하는 게 아니라 직면해야 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는 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집권세력이 ‘적폐청산’을 외치고 진보정당이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현재의 구도로는 이를 이루기 어렵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법처리의 완결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리 정치가 ‘숙제’의 답을 제출해야 하는 시한은 점차 다가오고 있다. 준비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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