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기억나십니까? 어느덧 2년이 흘렀습니다. 2년 전 오늘, 광장은 촛불로 붉었고, 그 촛불들은 그대로 많은 것들을 태우고, 품고, 바꾸며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긴 했습니다. 이른 위기를 경험한 정권은 강해져갔고, 일상이 된 야권의 지지멸렬은 정치에 대한 냉소를 자극했습니다. 무엇보다, 2명의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촛불을 든들 결국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경험칙의 세상에 와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광장은 닫혀있고, 선거를 20여일 앞두고 있지만 열정은 시들해보입니다.

촛불 2년, <미디어스>는 사소한 기록이나마 비범하게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나와 당신의 촛불 그리고 우리의 2년이 어땠는지, 묻도 답하며 위로하고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2년 전 오늘, 말로는 다하지 못할 뜨거움으로 기꺼이 하나의 촛불이 되었던 이들의 오늘과 만납니다. 나와 당신이 바로 촛불이었습니다. 그대 왜 촛불을 드셨었나요

조선일보가 지난 10일 촛불2주년 기획기사 “'광우병 촛불' 2년…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에서 촛불소녀였다는 한채민양을 인터뷰했다. 한채민양은 2008년 촛불집회 당시 발언대에서의 읽은 편지를 “전부 내가 쓴 것이 아니다”며 “나눔문화라는 단체에서 써줬고 시킨 그대로 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2008년을 밝힌 촛불의 의미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촛불 2주년의 현재를 기념하기 위해 맡았던 글은 “2주년 지금 촛불소녀는?”이라는 주제였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촛불소녀를 찾기 위해 먼저 ‘트위터’에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몇 명의 사람들과 연락이 됐지만, 인터뷰하기 어려웠다. 연락된 촛불소녀들이 아직도 고등학생 ‘소녀’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 ‘소년’, “새상이 바뀌어야 바뀌죠”

대신 소년을 찾았다. 현재 부산에서 대학 새내기인 소년은 촛불당시 부산 서면 태화쇼핑앞에서 교복을 입고 촛불을 들었던 사람 중 한명이다. 멀리 서울까지 원정도 갔다고 한다. 그가 다음 아고라에서 촛불집회를 만났다고 했다. 아고라를 보다가 “뭐라도 해야하겠다는 심정에 울컥하고 나갔다”고 말했다.

전화로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촛불이 삶을 얼마나 바꿨느냐는 질문에 그는 익숙한 부산 사투리로 “뭐 바뀐 거 없어요. 세상이 바뀌어야지 바뀐 게 있죠”라고 다소 냉소적으로 답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묻자, “그렇게 했는데, (세상이) 하나도 바뀐 게 없다”면서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로 돌아가도 촛불을 들 것”이라고 말했다.

잠시 공백을 두고 이어 “그래도 바뀐 건 있네요. 부산 서면로타리를 점거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고, 또 그때처럼 일이 생기면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는 것 정도”라고 밝혔다.

지금 시민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하느냐는 질문에 “아니다, 요새는 다음 아고라도 시들해져서 잘 안들어 간다”며 “학교 다니기 바쁘다”고 잘라 말했다.

서로의 출신학교와 사는 동네를 묻고, 중학교를 같은 동네서 나온 사실을 알았다. “선배시네요”라며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았다. 꼭 써줬으면 하는 말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요즘 같은 때 촛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앞에 서서 한마디도 못했지만 지금은 할 말이 좀 있다. 그때보다 더 많이 이상해지지 않았나? 누구라도 나서줬으면 좋겠다”

부산에서의 소주한잔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두 번째 '소년', 촛불 후유증이 목표를 만들었다

▲ 19살때 주장범은 촛불집회와 관련한 구속영장 청구대상자 가운데 최연소라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19살이었던 주장범군은 촛불집회에 2008년 5월 31일 촛불집회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처음 나간 촛불집회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형들이랑 종로에 갔었다. 그런데 촛불집회를 하고 있었다. 형들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촛불집회에 갔다. 그날은 거의 청와대 앞에까지 갔는데, 경찰들이 진압을 했다. 곤봉을 때리고, 방패로 찍고... 조금만 늦게 가거나, 조금만 빨리 가거나 했으면 나도 찍혔을 것이다. 토끼몰이 진압을 하고, 편의점 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끌어내 방패로 찍었다”

5월 31일은 유명한 사진을 많이 남긴 날이다. 대표적인 촛불소녀의 이미지, 방패에 뒷머리를 찍혀 피나는 머리를 지혈시키고 있으면서도 순수한 미소를 띤 한 소녀의 사진도 이날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촛불집회에 계속 참석하기로 이날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주장범군의 인생을 바꾼 계기가 며칠 뒤 찾아왔다.

6월 13일 촛불집회는 시청광장에서 광화문으로, 다시 KBS로 이어지고 있었다. 주장범군은 KBS 앞 촛불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수단체 회원들에게 각목으로 구타를 당한 박미라씨의 폭행장면을 목격했다. 보수단체 회원들의 각목 폭행을 경찰들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 주장범군은 당시 자리에 있던 경찰의 소속과 직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영등포서 담당계장이었다.

당시 박미라씨 폭행에 가담했던 박찬성 목사(대한민국어버이연합,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북핵저지시민연대, 보수국민연합 등의 대표)를 고발하는 데 주장범군이 목격자로 나섰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박찬성 목사는 무혐의로 풀려났고, 오히려 폭행혐의로 주장범군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박찬성 목사가 주장범군을 폭행혐의로 고발한 것이다. 당시 주장범군은 만 19세 전으로 미성년자였다. 촛불집회와 관련한 구속영장 청구대상자 가운데 최연소 기록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주장범군은 경찰서에 10여 시간 잡혀 있으면서 경찰들의 폭언과 욕설에 시달렸다고 한다. 주장범군은 “아직도 생생하다”며 “제가 혐의가 없다고 부인하니까 사진을 책상에 던지며 막 욕설을 했다. 순간 뒷머리가 서늘한 느낌이었다.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고 말했다. 두려움에 주장범군은 경찰이 제시한 채증자료를 모두 인정했다고 한다. 지금은 재판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주장범군은 “이제 6월달이면 결판이 난다”며 “벌금이 나올 확률이 40%, 집행유예가 나올확률이 60%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법무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집행유예가 나오면 합격이 취소되기 때문에 진로를 바꿨다”고 덧붙였다.

주장범군에서 ‘촛불이 나에게 무엇을 바꿨나’를 물었다. 그는 “촛불 전에는 책상에서 10분도 붙어있기 힘들었다. 경찰서에서 10시간을 지내고 몸살을 일주일을 알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지금은 책상에서 하루에 10시간, 많게는 15시간이 넘게 앉아 공부를 한다.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목표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법’쪽으로 공부하려고 한다. 원래는 법무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재판 때문에 접고 지금은 로스쿨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촛불집회를 겪으며 잘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나서기 좋아하고, 말하기 좋아하고, 글도 잘 쓴다는 말을 들었다. 법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 후회 안할 만큼 경쟁해 볼 자신도 있다”고 말했다.

‘어려운 일도 겪었는데, 촛불집회 때로 돌아간다면, 5월 13일 선배들과 있었던 종로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할 것인냐’고 물었다. 주장범군은 “촛불집회에 나간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그래도 조금 후회되는 것이 있다. 지금처럼 법을 잘 알았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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