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이 흐르던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김정일 위원장 일행을 태운 차량들이 미끄러지듯 베이징으로 입성했다. 관제의 풍경에 익숙할 베이징 시민들 조차 이 광경이 뭔가 싶어 넋을 잃었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 일행이 텐진에서 베이징으로 올 때는, 120km에 이르는 두 도시 사이의 고속도로를 아예 전면 통제하기도 했단다. 일부러 연출한, 여 보란 듯 작심함 풍경이다.

▲ 방중 중인 김정일 위원장 일행이 북경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 ⓒ KBS 9시뉴스 캡처

한국의 언론들은 아연실색하고 있다. 네티즌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라는 시각이 많지만 조중동을 비롯한 대다수의 언론들은 중국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는 선정적인 비분강개를 던지고 있다. '북중야합'이라는 복고 지향적 표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국내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일제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 있다. 과연, 중국이 왜 저러는지를 묻지 않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 일행을 파격 예우하고 있는 중국의 노림수야 물론, 복잡한 것일 테다. 그러나 복잡한 심사를 낳은 일말의 원인이 한국 정부의 황당한 행보에 있다는 것을 유추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관련해서 정부는 중국대사를 불러다 항의성 훈계를 하려 했지만, 오히려 중국 정부로부터 '장관의 말이 너무 길다'는 까칠한 응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럴 만도 하다. 정부는 불과 일주일 전 한중 정상회담 자리에서 천안함 사태에 대해 '신중한 접근, 객관적 조사'를 중국 정부에 다짐했고, 그 내용을 명명백백히 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바로 며칠 뒤에 건군 이래 최초로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를 열어, 대통령의 입을 통해 '천안함 사태가 사고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확정지어 버렸다. 국방부 장관은 그 날, 천안함이 침몰한 날을 '한국군 치욕의 날'고 기억해야 한다는 선전포고성 성토까지 뱉었다.

이 일련의 언급들이 중국에게 제대로 전달됐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정황으로 보건데 전달하지 않은 것 같고, 그래야 한다는 고민조차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이쯤 되면 신중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어리석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제 마음대로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정부는 그 발언들이 지극한 국내용 발언이었기에 중국이 불쾌할 수 있으리란 건 짐작조차 않은 것 같다.

천안함 사태는 우리의 앞바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의 먼 바다이기도 한 서해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통령의 언급대로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한다면 중국에게도 정치적으로 매우 예민한 긴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가 '신중한 접근, 객관적 조사'를 약속한 것에 중국이 만족감을 표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단 며칠 만에 한국 정부는 천안함 사태를 '익숙한 접근, 주관적 의심'의 도가니로 쳐 박으며 사태를 복잡하게 헝클었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행동을 중국이 어떻게 이해할지는 안 봐도 뻔한, 갑갑한 일이다. 김정일 위원장 일행의 베이징 질주가 불편해야 하는 것은 중국이 김정일의 방중을 귀띔해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국내용 안보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천안함 사태를 활용하며 당하지 않아도 될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낯 뜨거운 무능력함이 아닌가 싶을 만큼 대단한 착각이 작렬하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 일행의 베이징 질주 그것은 한국 정부를 향한 조롱과 모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천안함을 안보로 연결지어 정국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것 같다.

천안함 사태를 통해 이 정부는 외치와 내정 사이에 진실됨이 없다는 사실을 주변국에 들켰고, 내정에 있어선 통치에 일관성 따윈 없다고 자백하고 말았다. '자나 깨나 안보 걱정, 깊은 물을 다시 보자'던 이 정부의 통치용 안보논리가 결국 주변국을 불편케 하고,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우스개가 되어 가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중국의 파격적인 예우는 결국 우리 정부를 향한 메시지이다. 천안함을 갖고 장난치지 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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