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이 결국 스스로 사의를 표명했다. 전병헌 수석은 16일 여전히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대통령에게 누를 끼칠 수 없어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의혹만으로 사퇴해야 하느냐는 취지의 항변을 내놓은 지 불과 하루 남짓 만에 벌어진 일이다.

전병헌 수석의 사퇴는 시간문제였다. 검찰과 청와대 모두 물러설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에선 현직 정무수석이 직을 유지한 채 검찰 조사에 출석하는 상황을 용인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권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적폐청산’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병헌 수석과 독대하면서 “적절한 판단을 내려달라”는 발언을 통해 직접적면서도 완곡하게 사퇴를 요구한 것은 이런 이유다.

검찰의 사정은 좀 더 복잡하다. 어찌됐든 “하명수사”라는 비판에도 전임 정부의 여러 의혹에 대한 수사를 강행해야 하는 처지다. 전병헌 수석 사건을 허술하게 다뤘다가는 다른 의혹 사건 수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그렇잖아도 국정원에 파견된 이력이 있는 검사가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까지 벌어져 내부 단속이 시급한 상황이다. 검찰이 전병헌 수석 조사의 불가피성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만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전병헌 수석의 무혐의가 확인되거나 재판에서 무죄가 나온다면 검찰은 역풍을 맞게 된다. 청와대와 여당으로부터는 ‘적폐청산’의 발목을 잡기 위해 무리한 수사를 강행했다는 비판을, 야당으로부터는 정권 실세에 대한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 비난을 자초할 것이다.

반면 전병헌 수석이 끝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면 검찰은 이를 독립성을 확보한 증거로 자평할 것이다. 검찰 개혁에 대한 의구심을 꺾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설치 등의 문제에서 실리를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검찰은 전병헌 전 수석의 혐의 입증에 조직의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한국e스포츠협회의 자금 유용 의혹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소환 조사를 앞둔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이 16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사의 표명을 한 뒤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전병헌 수석 사퇴 이후 검찰은 정치권에 대한 압박 수위를 올려갈 수 있게 되었다. 현직 정무수석까지 끌어 내렸으니 이후 선택의 폭이 상당히 넓어졌다는 것이다. 검찰은 일단 ‘거물’을 낚는 수순을 이어갈 모양새다. 친박계 좌장으로 ‘진박감별사’라는 별명까지 붙은 자유한국당 최경환 의원의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수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검찰은 언론을 통해 이헌수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과 이병기 전 국정원장의 진술을 토대로 최경환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 국회 정보위원,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등을 지내는 과정에서 국정원으로부터 돈을 받고 ‘예산 편의’를 봐준 것이 아닌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최경환 의원 측은 해당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정치적 의도가 의심스럽다는 취지의 항변을 내놓고 있다.

검찰이 조준한 또 한 명의 정치인은 과거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자유한국당 원유철 의원이다. 검찰은 정치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원유철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 등을 15일에 압수수색했다고 밝혔다. 원유철 의원은 이미 지난해 지역구 플랜트 설비업체 관계자로부터 측근을 통해 돈을 받고 산업은행 대출을 알선해줬다는 의혹에 휘말린 바 있다. 당시 이 여파로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이 구속됐다.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원유철 의원은 이 외에도 또 다른 지역구 소재 기업인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원유철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받아 ‘신(新) 친박’이라는 평을 받은 일도 있으니 종합하면 검찰의 다음 타깃은 자유한국당 내 친박계가 되리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홍준표 대표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정국이다. 바른정당에서 건너 온 비박계가 서청원 최경환 의원 제명 요구에 다시 불을 붙일 수도 있고 친박계가 최경환 의원을 엄호사격하면서 당내 문제를 쟁점화할 수도 있다.

이런 국면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검찰의 수사를 빌미로 문재인 정권을 더 압박할 수밖에 없다. 1차적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재료’는 인사검증의 문제이다. 전병헌 수석 낙마는 결국 장관 후보자들을 두고 제기된 검증 실패의 연장선상이라는 것이다. 전병헌 수석에게 제기된 혐의가 새롭지 않고 이미 언론에 보도가 됐던 사안이라는 점에서 이런 논리에 힘이 실릴 수 있다.

당장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임명이 문제다. 동아일보는 17일 사설에서 “전 수석이 사퇴한 만큼 청와대는 홍종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임명도 재고하길 바란다”면서 임명 강행에 대해 “짚단을 안고 협치를 태울 불속에 뛰어드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전병헌 수석 문제가 홍종학 장관 후보자 임명 논란까지 확전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일각에선 홍종학 장관 임명 강행 문제를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 문제와 연계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검찰의 압박이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을 단일전선으로 묶는 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문재인 정권에 각을 세우며 ‘중도보수통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도 이런 흐름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안철수 대표 등은 16일을 기점으로 바른정당과의 연대 및 통합론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상태다. 여의도 인근에선 안철수 대표의 이러한 행보를 차기 대선에서 보수정치의 새로운 대표로 나서겠다는 전망이 실린 것으로 본다.

지방선거에서 전남지사 출마를 고려하고 있는 박지원 의원은 16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장애인 비하 발언까지 하며 안철수 대표의 이런 움직임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따로 중도보수통합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모아 원내교섭단체를 따로 꾸릴 수 있다는, 사실상의 분당 발언까지 나왔다. 국민의당은 21일 의원총회에서 진로에 대한 ‘끝장토론’을 한다는 계획인데, 비-안철수계 의원들은 전날까지 연서명과 성명을 통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방침이다.

아직 가능성이 커보이지는 않지만 국민의당이 실질적인 분당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면 더불어민주당도 원내의 세력관계 재편 움직임을 두고 일정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검찰이 다시 여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당 소속 의원의 추가 혐의를 제기하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 소속 의원 5명에게 특수활동비를 제공했다는 의혹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정치권은 초긴장상태가 될 수밖에 없고 주도권은 검찰이 가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 왔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또 다시 검찰의 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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