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행위는 과거와 지금이 같은지 다른지 비교하게 하고, 그 사이 수많은 시간의 물결과 주름을 알아보게 한다. 여행은 낯선 시간 속으로의 떠남이다. 여행자는 낯선 시간의 물결과 주름을 기억 속에 담는다. 그 기억을 통해 여행을 떠나기 전 그리고 여행 중의 자아 그리고 돌아오고 난 뒤의 자신을 비교한다.

연극으로 여행의 기억을 담은 이들이 있다. 극단 플레이위드의 여섯번째 작품으로 대학로 마방진 소극장에서 오늘 (4월 14일) 막을 내리게 될 <인디아 블로그>가 그렇다. 잘 쓴 여행담을 듣는 것은 참으로 즐겁다. 연극 <인디아 블로그>는 솔직 담백한 여행담을 무대에서 전개한다. 극이 진행되는 약 1시간 20분 동안 그냥 웃으며 박수 치고 공감을 던지고 하며 눈물 콧물을 다 뺐다.

ⓒ블로그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연극을 준비하는 기간은 모두 74일이었단다. 그 가운데 34일은 ‘여행 기간’이었다. 연출가와 배우 2명은 인도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라는 종착역 하나만 정해놓고 인도를 여행했다. 그 기록들을 책이나 블로그에 담는 대신 ‘연극’에 담았다. 연극 ‘인디아 블로그’는 젊은이들의 여행과 사랑에 대한 기억이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남자와 사랑을 끝냈다고 믿는 남자가 인천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인도 여행에 동행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블로그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연극은 아주 간단하다. 이렇다 할 무대 장치도 없고, 이렇다 할 스펙타클도 없다. 배우는 단 두 사람이 나와서 자신들의 인도 여행 이야길 수다 떨듯 쏟아낸다. 그리고 무대 소품처럼 기타리스트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20대 청년들이 인도여행에서 재현해 낸, 21세기판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그것도 아주 유쾌한 부조리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언급하는 건, 이 기다림의 시간이 흡사하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와 두 청년의 '사랑'이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작품이 펼쳐지는 공간은 다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리는 장소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시골이고, <인디아 블로그>는 그 기다림의 공간이 인도다.

하지만 이것은 아날로그의 공간적 개념이다. 21세기 디지털의 공간으로 확대하면, '블로그'라는 오지 않을 기다림의 공간이란 면에서, <인디아 블로그>와 <고도를 기다리며>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흡사하다. 물론 <인디아 블로그>는 무거울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젊음의 치기어린 낭만(그렇다고 그냥 낭만으로 치부하기엔 다소 절절한)과 한바탕 웃음으로 풀어냄으로써, 관객에게 새털처럼 아니 바라나시의 뱃사공이 흥얼거리는 주책만큼이나 귀엽고 가볍게 이야기 하고 있다.

ⓒ블로그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인도로 여행을 떠나는 두 사람은 '사랑'이란 한 가지 공통점을 지녔다. 두 사람 가운데 한 남자의 시간은 2010년 인도에 머물러 있지만, 실제 그의 사랑은 2006년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의 사랑은 이미 4년 전에 사라졌다.

그들에게 시간은 붙잡아두어야만 할 것, 도대체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시간 공포증chronos-phobia이다. 두 남자는 시간 공포증을 벗어나 인도로 도피한다. <인디아 블로그>는 포박의 두려움으로 부터 벗어나는 탈주극이 되는 셈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이명준의 탈주지가 인도였던 것은 이데올르기 문제였다. 그는 경계인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인디아 블로그>의 두 남자에겐 인도는 '존재의 무거움'을 털어내기 위한 지극히 사적인 탈주지다. 우리의 20대에겐 이데올르기는 사랑이다.

ⓒ블로그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두 사람의 인도 여행은, 사랑에 대한 신파같은 몸부림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종국에 바라나시에서 수장된다. 연극에서 가장 큰 재미와 감동은 발렌타이 데이에 부르는 한 남자의 노래다. 그리고 그 노래는 시간을 가둬 버린 남자의 고백으로 이어져 자칫 눈물까지 흐르게 한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마시압. 두 남자의 슬픈 사랑 이야기지만, 연극은 내내 유쾌 발랄하다. 인도로 떠나고 싶은가? 그냥 막연한 여행을 꿈꾸는가? 삶에 지쳤는가? 삶이 우울한가? 삶이 어느덧 무의미해 보이는가? 그리고 당신 역시 사랑을 잃었는가?

마지막 극적 반전은 그 4년의 시간을 토로해내는 고백성사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두 남자는 보속을 받았을까? 그래서 사랑을 통한 구원을 약속받았을까? 나로서는 오지 않을 사랑을 믿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베케트의 오지 않을 고도 처럼 말이다.

ⓒ블로그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남자는 오지 않을 사랑과 비슷한 용모의 여자를 바라나시에서 만난다. 그가 인도에서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쫒지만 그가 쫒은 건 비슷한 사랑의 흔적에 불과했다. 그 흔적에 그는 흔들린다. 그녀와 식사를 하기 위해 약속을 잡는데, 내일 저녁이란 막연한 시간을 말한다. 여자는 묻는다. 몇 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6시나 7시 8시 라고 답한다. 남자는 시간에 자유로운 듯 보인다. 실상은 시간에 구속되어 있기에 시간을 벗어나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이다. 여자에게 그 시간은 모호하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구속되어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남자와, 사랑을 잊은 것 처럼 보이는 여자는 잠시 서로 사랑을 실 가닥처럼 나눈다. 그 실은 너무나 가늘어 서로 확신하질 못한다. 그것은 여행지의 풋사랑일지도 모른다. 익명의 낯선 공간에서 낭만으로 풀어내는 지나가는 사랑. 삶이 어느 '시간'부터 잘못되어 꼬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자못 느릿한 시간 속에서 어느덧 돌아오기 위한 여행가방을 싼다. 그들은 잠시 멈칫하다가 결국 출발하고 만다. 거기에서, 더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디아 블로그>는 브레히트의 교육극 <예외와 관습>의 마지막 코러스를 연상케도 한다. "여행 이야기는 / 그렇게 끝납니다. / 당신들은 듣고 보았지요. / 일상적인 일, 늘상 일어나는 일을 당신들은 보았지요. / 우리는 그러나 당신에게 요청합니다. / 생소하지 않은 일을 의아하게 생각하시오! / 평범한 일을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시오! / 일상적인 일이 당신들에게 놀라움을 자아내야 하오. / 관습으로 알려진 일이 악습임을 깨달으시고 / 그리하여 악습을 깨달은 곳에서는 / 구제책을 강구하시오!"

세상 복잡한 게 많다보니 늘 머리 아픈 일만 생긴다. 사람에겐 마음의 탈출지라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런면에서 '인도'는 정신의 사치로 가득한 꽤 그럴듯한 탈출지가 된다. 그 인도로의 탈출을 꿈꾸는 연극 <인디아 블로그>는 세상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홀리데이가 된다. 그런데 그 홀리데이가 너무도 짧은 기간 동안 무대에 올려진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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