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신드롬(syndrome)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의 공통된 질환, 장애 등으로 이루어지는 일군의 증상'을 일컫는다. '트위터'(twitter)는 어떠한가? 스마트폰 출시 이후 트위터는 하나의 신드롬적 기호로 맹렬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는 트위터를 미지의 미디어 환경 도래에 앞서 떠밀려온 빙산의 일각이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열린 즐거움의 한 경지라고도 한다. 당신은 '트위터리안'인가? 혹시, 블로거라는 호칭에도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는데, 영 삶이 '스마트'하지 못한 것 같아 찜찜한 상태는 아닌가?

<미디어스>에서 트위터 신드롬의 현재 진행형을 추적하고자 한다. 과연, 트위터는 일방적 언론 장악의 상황에 맞서 정보유통의 민주화라고 하는 공통된 꿈을 향해 가는 상징의 영토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브랜드가 또 하나의 트랜드 되어가는 기착의 프로그램일런지 다양한 트위터리안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 진화의 현장을 기록하고자 한다.

지지난 토요일 오후, 요즘 트위터에 열심인 어느 대학 교수 한 분께 전화를 드렸다. (그는 트위터만 이용해 배우 장동건을 만나겠다는 야무진 자체 문화운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선생님, 산엔 잘 다녀오셨어요?”
“어이쿠! 지금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정리만 하면 되니까 오늘 안에 보내드릴게요.”
“허허. 부담 드리려는 게 아닌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이 짧은 대화 속에는 트위터가 쳐놓은 괄호가 있다. 나는 그날 그로부터 받을 원고가 있었고, 그의 트위터에는 ‘오전에 북한산에 다녀오겠다’는 짧은 글이 아침부터 올라와 있었다. 그가 제때 원고를 보냈는지는 밝히지 않겠다. 다만 나는 트위터 덕분에 빚쟁이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채무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고 있는 빚쟁이라니…. 나만의 트위터 용도를 체감하는 기회였다.

색다른 경험이 하나 더 있기는 하다. 내 딴에는 리트윗을 한다고 하는데, 누군가 내게 이런 리트윗을 해왔다. ‘근데 누구 앞으로 리트윗을 하신 거예요?’ 나는 그때까지도 리트윗을 할 때면 글 쓸 공간에 자동으로 디폴트돼 있는 글을 깨끗이 지운 다음 내 할 말만 했던 것이다. 이런 지적이 나오자, 당신이 뭘 모르고 있고, 뭘 잘못하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리트윗에서 호명이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리트윗이 줄줄이 떴다. 이런 이타적 트윗쟁이들 같으니라고!

그러나 거기까지다. 내 게으름 탓이 크겠지만, 더는 트위터에서 새로운 감동을 받아보지 못했다. 내가 트위터를 시작한 지는 한 달이 조금 넘었다. 처음 올린 글이 이랬다.

“난 한때 온라인 글쓰기에서 재미 좀 봤다. 그러다 블로그 바람이 불면서 도태됐다. 주변에선 말했다. 긴 문장, 어려운 표현, 띄엄띄엄 포스팅…. 실패의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다고. 트위터 시작한다. 내가 시대를 배신하는지 시대가 날 배신하는지, 보자!”

트위터를 시작하며 이런 글부터 올린 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에피소드를 몇 가지 소개하면 이렇다.

“선배가 커피를 마시는 것 보면 참 신기해요.” 주위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할 만큼, 난 동시대 사람들의 보편적 흥미와 기호에 좀처럼 동승하지 못하는 체질이다. 다른 후배한테서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선배가 (핸드폰) 문자를 그렇게 빨리 입력하는 걸 보면 신기해요.” 내가 4벌식 자판을 두드리던 타자병 출신이어서 자판의 변용에는 익숙한 편이다. 다만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도 띄어쓰기와 구두점 찍기를 원고지 쓸 때만큼 정확히 구사하다 보니, 남들 같으면 일반 메시지로 보낼 수 있는 것도 컬러 메일로 보내야 하는 경제적 피해를 입게 된다. 내 차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포크 가요가 100곡쯤 저장된 시디가 있다. 주야장천 같은 시디만 돌려대다 보니 내 차를 자주 얻어 타는 이로부터 “지겹지도 않으냐”는 지청구를 듣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무슨 신념도 아니고, 그저 체질이다. 난 여러 유형의 매체(일간지, 시사주간지, 온라인, 지상파, 다시 온라인, 그리고 월간지)를 업으로 삼아 전전해왔지만, 종이가 가장 체질에 맞는다. 그런 내가 한 달 전 트위터를 시작한 것은, 그리고 이태 전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하나의 이유에서다. 트위터든 블로그든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얼리 어덥터들의 캐치프레이즈. “정보 유통의 민주화!” 그저 ‘이거 재밌으니 해보라’고만 했거나, 혹은 ‘이거 하면 돈 된다’고 했으면 아무 부담 없이 눈길을 거두었을 것을, ‘민주화’라니. 그것은 내 신념을 직접 지시하는 정치적 계몽의 장치였다. 좋든 싫든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 멀미를 하더라도 그 배에 올라타야 한다. 그러나 나는 배 위에서도 쭈뼛거린다.

블로그와 트위터가 구현해야 하는 정보 유통의 민주화는 달리 말해, 기존 독과점의 해체다. 소수 언론자본이 지배하는 담론시장에서 누구라도 발언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커뮤니케이션사에서 분명 획기적인 진전이다. 그러나 블로그와 트위터가 기존 독과점을 해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조·중·동을 필두로 한 기존 미디어의 성채에 균열을 가하는 대항매체로서의 존재감은 2년 전 촛불정국 등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들을 숙주 삼아야 하는 존재 방식의 한계 또한 뚜렷하다. 역설적으로, 조·중·동이 없으면 블로그와 트위터도 없다. ‘반정립’으로 밀고 나아가기에는 힘이 달리고, ‘관계 조정’ 정도가 현실성 있는 최대치로 보인다.

정치적 실천과 재미에 대한 이원적 인식은 이제 미망이 된 시대다. 서울시청 앞을 ‘정권 타도’ 구호와 민중가요 대신 ‘대~한민국’과 대중가요로 전유할 수 있었던 경험은, 공간을 정치투쟁으로만 환기할 줄 알았던 세대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페이지뷰와 댓글을 통해 실시간으로 피드백되는 블로그에는 분명 이들 둘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이 엿보인다. 그러나 실천과 재미의 관계가 재설정되었다고 해도, 재미가 표준화·획일화되는 일은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다.

블로그에서 시사적 소재의 글은 예찬될지언정, 페이지뷰와 댓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은 단연 연예 관련 글이다. 소비사회의 문화양식이 그대로, 아니 오히려 확대돼 투영되고 있다. 더욱이 기존 독과점 매체의 탈정치화가 규율권력의 기획이라면, 블로그의 빌보드화는 지배질서를 내면화한 대중의 자발적 발화다. 내면화된 복종과 그 복종의 전시는 지배체제의 폐쇄회로를 완성시킨다. 소수의 스타와 다수의 팬덤으로 형성되는 담론 구조 속에서 ‘중간’의 서식 공간이 너무 협애한 것도 문제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와 트위터가 정보 유통의 기득권에 대한 대항 체계이기에 앞서, 내부 투쟁이 선행되어야 할 또 하나의 유통 체계라고 본다.

이마저도 나는 실천과 재미를 이원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대표적인 시사 파워 블로거인(그리고 지금은 파워 트위터이기도 한) 고재열 기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그토록 많은 글을 포스팅하는가?”라고. 그의 대답은 해석의 여백이 없이 꽉 차 있었다. “안 먹고 안 자고 한다.” 스타크래프트가 뇌리를 스쳤다. 그가 오로지 와신상담하듯 안 먹고 안 자면서 블로그와 트위터를 계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블로그와 트위터는 실천과 재미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일 터이다. 그렇지만 블로그나 트위터에서 재미를 못 느끼는 자에게 실천을 요구하든 재미를 요구하든, 그것은 또 하나의 타자화가 아닐까.

그렇다고 그가, 그리고 블로그와 트위터를 예찬하는 이들이 내게 직접 요구한 적은 없다. 솔직히 내가 앞에서 늘어놓은 ‘체질’에 관한 주장은 정작 용렬한 ‘역량’에 대한 자기변명인지 모른다. 그걸 더욱 절실히 느끼는 것은 트위터에서다. 블로그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정보 유통 권력을 행사했던 포털의 손아귀에서 이 ‘수다기계’가 벗어난 것은 내러티브 독점의 해체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건 내게 소설의 시대에서 시의 시대로의 귀환을 예고하는 것처럼 비쳐진다. 복잡한 시사적 맥락을 몇 마디의 감정적 표현에 온전히 내포하고, 그것을 다시 정치적 실천으로 이행할 수 있는 공명의 울림판으로 삼는 역량은, 미학을 넘어서 각별히 내공이라고 불러야 옳다. 그럴 재간이 내겐 없다. 나는 겨우 서술한다.

인문학 파워 블로거인 이택광 교수에게 편지로 물은 적이 있다. “어떻게 그토록 높은 수준의 글을 거의 매일 같이 포스팅할 수 있는가?” 그의 대답은 여백이 컸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과연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걸까. 철학자 김영민 교수의 홈페이지 ‘평산장해K’(http://www.jk.ne.kr/in-1.html)는 블로그의 전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으나, 온라인도 얼마나 고졸하고 웅숭깊을 수 있는지, 그 극치를 보여준다. 이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바는, 마셜 맥루한의 기술결정론을 타기하거나 넘어선다. 블로그의 시대든 트위터의 시대든, 이들의 인문과 사유에는 걸림이 없다.

나는 정보 유통의 민주화에 대한 계몽적 요구와, 산과 물의 분별을 넘어서는 지적 경지 모두를 기웃거린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지못해. 나는 이것을 스스로 곤경이라고 부른다. 과연 돌파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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