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2월 13일 중국 양쯔 강 남동쪽 연안에 있는 도시 난징(南京)으로 진격한 일본군은 예하 부대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린다.

- 모든 전쟁 포로를 처형한다.
- 처형방법: 포로들을 12명씩 나눠 총살한다.

당시 일본군의 작전개념은 가는 곳마다 모두 죽이고 모두 빼앗고 몽땅 불태운다는 의미의 ‘삼광작전’이었고, 그런 일본군에게 포로 처형은 식량 부족과 혹시 모를 보복의 우려를 단숨에 해결해주는 수단이었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은 곧장 무장하지 않은 중국의 민간인 포로들을 상대로 끔찍한 살육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총을 쏴 죽이거나 칼로 목을 베는 건 기본이었고, 산 채로 포로를 묻거나 불에 태우고 사지(四肢)를 절단했는가 하면, 사나운 개의 먹이로 던져주기까지 했다. 산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도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굶주린 포로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행군을 시키고, 장이 터질 때까지 코에 기름을 강제로 붓고, 여자들을 벌거벗긴 뒤 뜨거운 난로 위에 앉게 하고, 나무에 묶어 놓고 죽을 때까지 발로 차고, 포로들을 염산이나 황산에 담그는 등 상상을 초월한 잔혹 행위가 저질러졌다. 심지어 시신에서 심장과 간, 고환까지 잘라 먹었고, 중국인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위해 시신을 갈아버리는 일도 있었으며, 일부 포로는 생체실험에 쓰기도 했다. 타다만 시신이 산을 이뤘고, 그보다도 많은 시신이 양쯔강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 1937년 12월~1938년 1월까지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과 그 주변에서 벌어졌던 대학살 관련 사진.
중국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범죄는 역사상 최악의 집단 강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은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강간을 자행했는데, 강간을 쉽게 하기 위해 여자 아이들의 성기를 칼로 자르고, 임신부를 강간한 뒤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 갈기갈기 찢는 일도 다반사였다. 난징 강간의 3분의 1이 백주대낮에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거리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아버지에게 딸을, 오빠에게 여동생을,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게 했고, 강간한 여성의 성기에 병이나 나무막대를 꽂아 시신을 모독했으며, 포로에게 죽은 여성의 시신을 범하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달아나다 붙잡힌 여성은 본보기로 눈알을 뽑거나 가슴을 도려냈다. ‘지옥에서의 6주’ 동안 많게는 35만 명이 넘는 중국인이 살해됐고, 적게는 2만 명에서 많게는 8만 명에 이르는 중국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역겨웠던지 난징에 머물고 있던 독일 나치들조차 공포에 떨 정도였다. 당시 상황은 훗날 참전병사들의 다음과 같은 기록과 증언으로도 생생하게 전해진다.

“착한 아들, 훌륭한 아버지, 다정한 오빠였던 사람들이 전장에 나와서는 가책 없이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 살인마로 변해 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세 달 만에 악마로 변해 버렸다.”

“군인들은 갓난아기를 총검으로 찔러 산 채로 끓는 물에 던져 버렸다. 군인들은 열두 살짜리 소녀부터 여든이 된 할머니까지 가리지 않고 윤간했고 이들이 자신의 욕구를 더 이상 만족시켜주지 못하면 그 즉시 죽여 버렸다. 내가 목을 베거나 불태워 죽이거나 산 채로 파묻은 사람이 200명이 넘는다. 나 자신이 그런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니 정말 끔찍하다. 나는 인간이 아닌 악마였다.”

불과 단 6주 동안에 저질러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행으로 난징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무도한 악(惡)의 상징이 되었다. 난징의 학살은 광기 어린 미치광이 살인마들에 의해 저질러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행, 잔인함의 극치, 짐승 같은 짓, 끔찍한 살육의 욕정과 발광으로 묘사되었다. 베트남전 당시 밀라이 학살에 가담한 병사들이 그러했듯 일본군 또한 살육 행위 자체를 즐겼다. 병사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런 거부감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일본 군부가 살인 게임과 연습을 반복시킨 결과였다. 감정을 서서히 무뎌지게 만들고 끝내는 죄책감까지 거세하는 이 같은 과정은 난징의 학살이 일본의 주장대로 일시적인 군기 문란이 아니라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공식적인 발작 행위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난징 대학살이야말로 “고삐 풀린 군사적 모험주의 아래 깔려 있는 사악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한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여론 조작이었다. 영화 <황시>에서도 볼 수 있듯, 난징 거리 곳곳에 나붙은 선전 포스터에는 “집으로 돌아가라! 일본군이 쌀을 줄 것이다. 일본군을 믿고 의지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통제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 (아이리스 장, 2006)
국제적인 비난 여론에 일본이 내놓은 반응은 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일본은 난징의 강간이 문제가 되자 그 대안으로 아시아 각지에서 수많은 여성을 데려다 대규모 위안부 제도를 만들었다. 1938년 일본군의 첫 공식 위안소가 난징 부근에 세워짐으로써, 난징 대학살은 우리 과거사와도 직결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출발점이 된다. 1946년 5월 도쿄에서 시작된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이듬해 2월까지 천 명이 넘는 중국인이 4백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증언하는 기록을 남겼고,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이 전범재판을 통해 일본군과 관리 28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입을 다물었다. 미국도, 중국도 전쟁 책임을 묻지 않음으로써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워진 천황은 변함없이 신성한 존재로 평화로운 여생을 누렸고, 저자 말대로 일본은 난징 대학살이란 명백한 과거를 역사책에서 지우려는 또 다른 잔학 행위를 저질러 왔다. 과거와 대면하기를 완강히 거부한 채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란 꼬리표를 달아 폄하했고, 끊임없는 분쟁을 야기해온 일본 문부성의 검정 교과서는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난징 대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불편한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해왔다. 이시하라 신타로, 나가노 시게토, 후지오 마사유키, 가지야마 세이로쿠 등 일본의 유력 정치인과 고위 관리들은 난징 대학살을 중국이 꾸며낸 거짓말로 매도하면서 강제 징용된 일본군 위안부는 자발적인 매춘부였으며, 심지어 한일합방에 조선이 기꺼이 동참했다는 등 갖은 망언(妄言)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살아남은 이들 앞에 놓인 운명은 가혹했다. 난징 대학살 당시 수많은 사람을 구해내 ‘난징의 살아 있는 여신’으로 불린 미국인 윌헬미나 보트린은 고통스런 기억에 신음하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난징에 안전지대를 만들어 수십 만 명을 구해 ‘난징의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된 독일인 사업가 욘 라베는 종전 뒤 돌아간 고국에서 지독한 곤궁(困窮)에 시달려야 했다. 영어로 씌어진 난징대학살에 대한 훌륭한 첫 보고서로 평가되는 이 책의 저자 역시도 책 출간 뒤 공포와 협박에 시달리다 2004년 11월 9일, 36살의 아까운 나이로 숨진 채 발견됐다. 저자는 “일본 신보수주의자들의 끈질긴 모함으로부터 난징의 희생자들을 구해내기 위해 씌어진 이 책은 난징에 남아 있는 수십만 개의 주인 모를 무덤에 바치는 묘비명인 셈.”이라면서 난징 대학살의 교훈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난징의 강간은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십대들의 천성을 변질시켜 그들을 살인 병기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지 이 사건은 잘 설명해준다. 두 번째로 난징의 강간은 민족 학살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보여주었다. (…)세 번째 교훈은 가장 비참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대량 학살을 받아들였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사건에 대해 수동적인 방관자가 되었다.” 제법 긴 세월이 흘러 생존했던 피해자들은 고령으로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은 기약이 없다. 치유되지 않은 과거가 악몽 같은 기억과 더불어 계속되는 고통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여 이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고통스런 과거의 기억과 마주앉아 진지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인 바, 저자가 금과옥조처럼 여긴 다음 구절은 이 책이 씌어진, 그리고 되도록 널리 읽혀야 하는 까닭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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