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가능성은 초단위로 희박해져갔다. 정부의 대응은 엿가락처럼 꼬였고, 말은 천리를 갈듯 늘어져만 갔다. 한 마디로 무능함이었고, 열 마디를 해도 무능함이었다. 그 처절한 무능의 시간 속에서 산자는 돌아올 기약이 없어지는 자를 기다리는 사무침으로 떨었다.

그 시각, 여론의 공간은 음모론이 횡행했고, 갖가지 추측은 지금까지도 사납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엿가락처럼 꼬여 버린 일에, 아직도 늘어지고 있는 말이었다. 바로 이때, 사건 발생 사나흘이 지나자 언론은 스멀스멀 안보 상업주의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사건의 스펙터클에 잠시 머뭇거리던 조중동을 비롯한 기회주의 매체들은 손해 볼게 없다는 판단이 서자, 득달같이 ‘북한 개입설’로 치고 나왔다. 다른 언론들도 이를 못이기는 척 따라가고 있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확률이 점점 낮아지는 상황에서 기회를 놓칠 새라 충성스런 독자를 충실히 위무하는 궁극의 마케팅이다. 천안함 참사는 어느새 정부의 무능함이 빚어낸 부조리한 형상들을 향해 언론이 기묘한 ‘맨션’을 보태는 형국으로 변질되고 있다.

언론은 지금 정확하게 묻지 않고, 제대로 지적하지도 않고 있다. 한나라당의 말마따나 ‘구조’가 먼저이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구조와 그것은 별개이다. 이명박 정부 3년차 어느새 언론은 무얼 묻고, 지적해야 하는지 자각조차 못하는 동반 무능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동시에 사회의 수준이 저열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안함 참사는 점점 언론이 정부가 무능하다는 걸 정면으로 지적하지 못하며, ‘내부의 문제’와 ‘외부의 문제’를 구별해내지 못하는 형편없는 집단이라는 걸 폭로하는 사건이 되어가고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이 30일 오후 해군 초계함 천안함 침몰 사건 현장인 백령도를 방문해 구조작업중인 독도함에서 상황보고를 받고 있다.청와대 제공

국가를 위해 복무하던 생때같은 46명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건만, 정부는 사건 발생 엿새가 지나도록 가장 간단하고, 본질적이되 최소한이기도 한 ‘사실’ 조차 설명하지도 설명할 의지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쯤 되면 국민을 위한 국가가 아님은 물론이고, 그냥 국가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참사가 민간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기간 조직이라 할 군의 문제임을 상기하면 더더욱. 언론은 이 지점에서 득달같이 일어나야 했다. 정파 상관없이 특수한 이해관계가 아닌 보편의 상식이 작동한다면 그래야 했다. 경마보도를 할 일이 아니다. 언론의 역할이 구조 중계방송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일각에서는 언론이 사건을 후벼 파지 않는 상황을 놓고, 한국 주류 언론 자체가 보수적인지라 그 정파성이 정부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번 사고가 지난 정부에서 벌어졌다면, 보도의 양상이 확연히 달랐을 거란 얘기다.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매서웠을 테고, 쪼가리 사실들까지 엮어 추리되고 추론되었으리란 지적이다.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옳지 않다. 언론의 질서가 ‘보수’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맞다. 이명박 정부는 실제 내용이 어떠하건 간에, ‘보수’를 표방하는 정치권력이다. 보수주의의 핵심은 현 체제의 수호에 있고, 군은 바로 그 체제 수호의 상징적 기호이다. 상징적 기호를 유실한 채, 통치를 유지해갈 수 있는 보수의 메커니즘은 없다. 언론에게도 적용된다. 언론의 정파성이 ‘보수’에 있다면, 언론이 이 문제에 대해서 관대해서도, 관대할 수도 없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언론은 한없이 관대하다. 그래서 이건 정파성의 문제라기 보단 ‘염치’의 문제이자 ‘실력’의 문제이고 ‘종속’의 문제이다.

역시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진보’를 표방했던 정치권력 시절, 언론이 설절한 상징적 기호는 ‘청렴’이었다. 사회의 변화가 개혁을 꿈꾼다며 구태는 안 된다는 간단 논법이었다. 그 때, 언론은 정치적 결과보다는 정치 외적인 행위의 투명성으로 정치권력의 운명을 결정했었다. 일종의 ‘심정도덕’이었는데, 그때는 염치 불문하고 몰아세웠고, 술자리 사담까지 추적하는 발군의 실력을 보여줬었고, 언론이 5년짜리 정치권력보다 위에 있다는 걸 각인하려 애썼다. 그걸, 이제와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다. 그 때의 그 가을 찬서리 같던 언론은 어디 갔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바로, 지금 필요하단 말이다.

천안함 침몰 사건은 분명, ‘스트레이트’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사고 발생 그리고 깔끔한 종료’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체제의 수호를 표방하는 정부의 존립을 흔드는 치명적 사건이다. ‘진보’에 대한 ‘심정도덕’이 작동했던 문법처럼 ‘보수’에 대한 ‘심정도덕’도 작동해야 할 시점이고, 그래야 사회의 목탁이 울리는 최소한의 형평성이 생긴다. 결정적으로 선후가 뒤바뀐 ‘팩트’는 없는지, ‘팩트’를 은폐 또는 엄폐한 흔적은 무엇인지 언론이 가을 찬서리를 내릴 시점이다.

그런데 언론은 머뭇거리고 있다. 그 머뭇거림을 위장하기 위하여 교묘하게도 북한에 대한 낙후된 공포를 재활용하거나 한 명의 죽음을 영웅화 시키고 있다. 사고 발생 직후 벙커로 들어가 버린 대통령의 쇼맨십을 지적하기는커녕. 때때로 정부의 무능함을 짚더라도 단발성이다. 이 모든 무능함이 연출된 고도의 전략일 가능성은 아예 배제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던, 대통령의 표현에 따르자면 국운이 상승한 국가가 믿을 수 없이 엉성하고 폐쇄적이란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드러난 후에야 언론은 겨우 스트레이트로 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 지난 26일 밤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침몰하는 순간이 구조에 나선 해경에 의해 촬영되었다. 침몰 중인 '천안함' 선수에 적힌 초계함 고유번호 '772'의 일부가 보이고 있다. ⓒ 해양경찰청 제공

당장에 언론은 1200톤급 초계함인 천안함이 왜 육지 1마일 25m 바다에 들어섰는지 궁금한 ‘척’만 할 뿐, 뭣도 않은 채 정부의 브리핑만 기다리고 있다. 이 정도 규모의 사안이라면 마땅히 TV 토론이라도 편성하거나 전문가들을 불러 모아 좌담이라도 벌어봐야 할 테지만, 관련한 증언을 해 줄 이들이 차고 넘쳤지만, 언론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속초함이 왜 때마침 바로 그 때, 새때에 주포를 발포한 것인지, 9시 16분에 천안함에 걸렸다는 비상상황의 진실은 무엇인지, 어선이 발견한 것을 해군은 왜 이틀이나 보지 못했는지, 40분짜리 동영상이 1분 편집으로 제공된 연유는 무엇인지 언론은 그저 호들갑만 떨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있다.

언론은 지금 그 모든 것보다는 우선해 다함께 ‘기적’이나 기원하자고 바람을 잡고 있다. 바야흐로 방관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천암함 침몰 사건은 이명박 정부 집권 3년간 언론 환경이 얼마나 퇴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전람회가 되어가고 있다. 46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두고 ‘군사 보안’과 ‘대외비’를 둘러대는 파렴치한 정부가 계란을 맞지 않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이 부적절하고 부조리한 저널리즘의 현장임의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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