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고성욱 기자] KBS가 대규모 다큐멘터리를 기획, 연출하던 PD가 수신료국으로 차출돼 선발 기준이 불투명하다는 내부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KBS는 13일자로 48명을 수신료국으로 파견하는 내용의 인사를 단행했다. 소규모 인사를 포함하면 현재까지 50여 명이 수신료국으로 인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일 KBS는 입장문 <수신료 담당 인력 선발에 대하여 알려드립니다>에서 “현재 공사 위기를 극복하기 전까지 수신료 재배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A PD는 13일 사내 게시판에 “내년 9월 방송 예정이었던 대기획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기획하고 연출해온 메인 PD 선배가 수신료국으로 발령받았다”며 “발령받은 선배는 대기획 다큐를 직접 기획한 원안자”라고 밝혔다.
해당 PD가 제작하던 다큐는 <트랜스 휴먼 비긴즈>(가제) 3부작으로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는 과학 기술에 대한 내용이다. 구체적인 방송 예정 날짜까지 잡혔으며 해외 촬영도 완료된 상황인 것으로 전해졌다. 제작진은 최초 메인 기획자 없이 프로그램이 제작되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며 수신료국에 파견된 PD가 복귀한 뒤 제작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을 사측에 전달했다고 한다.

A PD는 “모든 제작진이 꾸려져 촬영까지 진행되고 있던 상태에서 하루아침에 프로그램이 갈 곳을 잃었고, 원작자 없이 프로그램 제작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며 “대기획 다큐는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맡고 있는 역할을 다하는 방식이자, 수신료의 가치를 보여주는 장이다. 그런데 기획의도와 방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원안자가 한창의 제작 과정에서 갑자기 제외된 것”이라고 말했다.
A PD는 이어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조치”라며 “시청자들에게 수신료의 가치를 보여주고 KBS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할 시점에,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프로그램 제작과 회사 운영을 위해 헌신해온 KBS 구성원들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에 어느 날 갑자기 일괄 배치됐다”며 “필요한 업무와 인원에 대한 투명한 공개나, 수신료 업무를 개선할 방법에 대한 고민 없이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며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갑작스레 차출해버리는 깜깜이 방식의 발령이 최선이냐”고 따져 물었다.
A PD는 “이러한 상황에서 구성원들은 어디서 제작할 의지를,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동력을 찾아야 하냐”며 “방송을 열심히 기획하고 만들어도 언제든 손쉽게 제작 과정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최선을 다해 만드는 방송의 가치가 결국엔 주먹구구식 결정보다 못하다는 허무함도 든다”고 토로했다.
해당 게시글에 '공감한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한 PD는 “사내 기획안 공모에서 통과돼 진행 중인 PD를 현업에서 배제하는 것은 대체 뭘 얻고자 하는 결정인가, 정말 이해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다른 PD는 “콘텐츠 만드는 회사로서의 정체성이 선을 넘은 것”이라며 “수신료를 받을 수 있게끔 만드는 본질은 시청자에게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번 구성원의 의욕과 사기를 꺾어가며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프로그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KBS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나” 등의 비판도 있었다.
수신료국으로 인사된 B 기자는 14일 사내 게시글을 통해 ”조용히 떠날까 생각도 했다“면서 ”그러나 우리가 공동체라고 생각해 왔던 공간에서 오랜 시간 얼굴을 맞대고 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에 의해 광기로 얼룩진 야만과 모욕의 역사가 정의와 배려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음을 흐릿하게 흔적으로나마 남겨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B 기자는 “신임사장 선임 국면에 여러 동료분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당혹감을 깊이 공감한다”며 “공영방송의 무게를 지키려는 여러분들의 장한 노력에 숟가락 한 술도 얹을 수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14일 성명을 내어 “사측은 지난해 파견자 수(128명)에 비해 올해 총 몇 명이 파견을 가는지, 사측이 말한 대로 직종별 인원 대비 비율과 차이가 어떻게 되는지 등 기초 정보조차 직원들에게 제시하지 않아 불신을 키우고 있다”며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아무렇게나 인사를 한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업무처리 방식”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파견을 한 해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지난해 대비 총원 및 직종별 인원의 변화, 변화의 합당한 이유, 파견자 선발 기준 등을 명확히 제시해야 할 것”이라며 “직원들의 관심이 높은 만큼 사측은 그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정하게 시행하여 직원들이 신뢰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각종 현장 개선책들에 대해 진행 상황을 설명하라”며 “수신료 업무 담당자들에 대한 정신건강 실태 조사도 실시하라. 박민 사장과 수신료국장도 노사협의회 때 시행하겠다고 답하지 않았는가”라고 강조했다.
KBS같이(가치)노조는 지난 8일 성명에서 “수신료 2차 파견 인력 중 사내공모로 충원하지 못한 수십 명을 각 본부마다 강제로 차출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된 공지 하나 찾아볼 수 없다”며 “현재 현황이 어떻고, 무엇이 다른 상황이고, 왜 이 정도의 인력이 파견되어야만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깜깜이 선발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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