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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주의의 ‘쌩까기’ 기술[안영춘의 미디어너머] OBS 경인TV 기자
안영춘 OBS기자 | 승인 2007.11.05 09:36

며칠 전 다리가 부러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당대의 건축공학과 산업디자인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댄(아직 한쪽 다리는 멀쩡한) 성인에게 적대적인, 적어도 무자비한 학문이었다. 세상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용변 보는 것조차. 세렝게티의 포식자들이 네 다리 가운데 하나만 부러져도 굶어죽는다더니, 내가 사는 이곳이 곧 정글이었다. 가끔 장애인 관련 기사를 써왔던 경험은 내게 ‘의식’으로서 아무 의미도 없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테제만이 더없이 적확했다.

내가 장애인이었다면 내가 쓴 기사도 달라졌을까? 얼치기 한시 장애인이 되고 나서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뜻없이 던진 이 물음은, 그러나 저널리즘의 ‘객관주의’를 마침내 겨냥하게 되어 있다. 저널리즘의 객관주의는 매체에 담긴 정보가 ‘사실(fact)' 그 자체이거나 철저히 사실에 입각해 있음을 현시(顯示)하는 주류언론의 최상위 규범이다. 서구 근대철학이나 근대과학의 객관주의 인식론이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객관주의가 수백년 전성기를 지나 서둘러 퇴역하고 있는 지금, 유독 저널리즘의 그것만큼은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퇴역하는 객관주의, 유독 저널리즘에서만 왕성한 까닭

   
  ▲ 경향신문 11월5일자 1면.  
 
오래가는 것에는 그만한 ‘비기’가 있기 마련이다. 20년 전쯤 ‘탱크주의’를 앞세운 가전제품 마케팅이 있었다. 단순해야 오래간다는 게 요지였다. 기실 저널리즘의 객관주의도 더없이 단순하다. 시위 현장에서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보고하는 수습기자들이 몇 년에 한 명씩은 꼭 있다. “학우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습니다.” 그럴 때 데스크의 대응은 정해져 있다. “아, 그래? 짐 싸서 학교로 돌아가.” 저널리즘의 객관주의를 이만큼 단순명쾌하게 보여주는 삽화도 드물다. ‘티 내지 않기’.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겉으로 주관성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물론, 단순성 자체가 가치를 폄하할 근거는 못 된다. 오히려 추상성이나 모호함을 걷어낸 단순명쾌함을 문제해결 방식으로 강조한 ‘오컴의 면도날’은 1천년이 다 되도록 유효한, 아주 오래가는 법칙이지 않은가. 저널리즘이 객관주의를 포기한다면 ‘사실’의 사회적 유통 체계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누구라도 똑같이 보고 똑같이 기술하는 것이 공상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해도, 그런 지향 없이 정보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산업으로서 매스미디어가 객관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구조의 산물인 셈이다.

   
  ▲ 동아일보 10월30일자 12면.  
 
저널리즘에서 객관주의는 화자가 1인칭 주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형식화된다. 오늘 아침 신문이나 어젯밤 방송에서 기자가 “나는…”이라고 하는 경우를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관성은 표현에서부터 엄격하게 통제된다. “학우들이 경찰에 쫓기고 있다”고 보고한 수습기자가 치도곤을 당한 건 그 표현 안에 1인칭 화자가 내장되어 있어서다. 그러나 수습기자들이 말실수 한 번으로 매번 짐을 쌀만큼 언론사 분위기가 엄격하더라도, 우리 언론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수용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 또한 객관적인 현실이다.

언론이 1인칭을 감출수록 수용자들은 더 도끼눈을 치켜뜬다. 주류언론들의 자의적 보도를 비판하는 글로 가득 채워졌던 최근 <미디어스>의 첫 페이지는 이의 방증이다.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보도만 놓고 봐도, 불과 얼마 전까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도색잡지 되기를 마다지 않던 신문들 대부분이 (객관적으로 표현할 때) ‘비보도’ 또는 ‘소극적 보도’로 일관했다. (주관성을 가미해 표현하면) 한마디로 ‘쌩깐 것’이다. 이들은 따로 짬짜미할 필요도 없이, 공익을 사익으로 환원하는 데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경지에 올랐다. 이들의 객관주의는 정작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과정에 복무한다.

‘삼성 비자금 + 언론의 객관주의 = 침묵의 카르텔’

여기서 객관주의는 더는 ‘규범’이 아니다. ‘신화(Myth)'다. 그 신화 체계 속에서, 3인칭 주어의 모든 언설은 곧 ‘객관적 사실’이 된다. 1인칭은 은폐되고, 사익은 공익으로 둔갑한다. 언론학자 남재일은 이와 관련해 “나의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말은 나의 이익에 대해 탐욕적이고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기 쉽다”고 지적한다. ‘사실’이라고 다 같은 사실은 아니다. ‘선택되는’ 사실과 ‘선택되지 않는’ 사실이 있고, ‘텍스트만의’ 사실과 ‘콘텍스트를 아우른’ 사실이 있다. 그러나 신화의 깔때기를 거치고 나면 그런 구분은 아예 사라진다.

   
  ▲ 중앙일보 10월30일자 10면.  
 
문제는 객관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 신화 뒤에 숨어 부리는 ‘꼼수’다.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 보도 너머에는 오늘날 객관주의 신화의 복잡해진 뒤안길이 있다. 주류언론의 독과점 시절만 해도 암흑 천지였던 그곳에 빛이 들다 보니, 신화의 아우라도 협소해지고, 이에 따른 언론의 대응도 복잡해지고 있다.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시치미 떼는 신문들의 꼼수는 눈 속에 머리를 처박은 꿩마냥 차라리 천진스럽다. 가십기사 정도의 크기로, 자료에 입각한 주장과 자료 없는 반박을 똑같은 비중으로 다룬 더 많은 신문들의 아슬한 외줄타기는 참으로 고단해 보인다.

언론이 사실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어느 매체도 모든 사건을 다 기록하지는 못 한다. 콘텍스트의 기록도 무한 확장할 수는 없다. 어디선가 경계를 그어야 한다. 그래서 언론의 객관주의는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흔들리며 길항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당대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텍스트로 재구성하고 컨텍스트를 짚으며, 다른 언론들과, 나아가 수용자들과 연대-경쟁-대립-확장-수렴해야 한다. 그러려면 객관주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다리 부러진 나와 사지 멀쩡한 나를 다른 나로 구분해서 보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1993년 <한겨레>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줄곧 사회부 쪽에서 일했다. 지금은, 사상 초유의 정파(停波) 사태를 겪고 눈물겨운 투쟁 끝에 새 방송을 시작하는 OBS경인TV에서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문제연구소장’을 자처하고 산다. ‘쿨하다’를 날씨 상태에 대한 표현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송진처럼 끈적한 386의 시대적 아비튀스에 갇혀 있지만, 일상의 억압에 관한 미시담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려고 노력한다.

안영춘 OBS기자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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