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담이 칼럼] 어렸을 때도 나는 나에게 녹록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않았고, 잘했다고 칭찬하는 일도 드물었다. 아마 칭찬을 받고 자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칭찬에 인색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대가족에서 아버지는 가난한 집의 장손으로 넷이나 되는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우리 형제가 태어나고 고모와 삼촌이 하나둘 가정을 꾸렸지만 살림은 좀처럼 넉넉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근처 대학생들을 하숙생으로 받아 삼시 세끼를 챙겼다. 팍팍한 생활 속에서 우리의 마음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돌볼 시간조차 없었다.
어머니는 칠 남매 중 넷째였다. 병중이던 외할머니 대신 집안일을 맡다가 학교를 그만두었고, 오랫동안 외할머니를 돌보고 집안일을 맡아 돌보다 시집을 왔다. 농사를 크게 짓던 외가는 일꾼도 많았고, 외할아버지는 교육열이 높은 사람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둘째 이모를 업어 학교에 보내던 분이었다. 그런 외할아버지가 왜 유독 어머니에게만 학업을 멈추게 하고 집안일을 돌보도록 했는지, 어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돈을 주고 사람을 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어머니였을까. 아마 그때부터 어머니는 자기 마음을 돌보는 법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을 세심히 어루만지는 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어머니는 자식에게 칭찬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칭찬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감정을 제때 드러내고 솔직하게 표정 짓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우리 형제가 마음 아파할 때 어머니는 어떻게 풀어줘야 할지 몰라 더 깊이 걱정하고, 더 오래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나 역시 칭찬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특히 나에게 인색했다. 사소한 실수에도 날을 세워 자책했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감정을 누르는 법부터 배운 탓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다만 괜찮은 척하는 법을 배운 아이였다. 누가 “괜찮니?”라고 물으면, 그 질문이 “괜찮은 사람처럼 굴어도 되지?”라는 요구로 들렸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괜찮다’는 말은 용기의 말이 아니라, 감정을 감추는 말이 되었다. 그 말 뒤에 숨으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고, 어른들의 안심에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나조차도 내 감정의 모양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늘 괜찮은 척’하며 살았지만, 사실 괜찮지 않은 날이 괜찮은 날보다 더 많았다.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어른이 된 뒤, 말은 마음을 풀기보다 접어 넣는 방식으로 쓰였다. 관계가 멈추지 않도록, 일이 덜 흔들리도록, ‘괜찮다’는 신호를 반복 전달했다. ‘괜찮다’라는 말이 나를 보호해 줄 때도 있지만, 쌓이고 쌓여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는 날도 있었다.
가끔은 아주 사소한 순간에 마음이 무너진다. “요즘 괜찮아?”라는 물음, 조용히 내 앞에 놓인 따뜻한 차 한 잔, 밤늦게 도착한 “오늘도 잘 버텼다”는 문자 한 줄. 그때 깨닫는다.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건 ‘괜찮다’는 답이 아니라,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되는 자리였다는 것을. 말이 허락된 자리, 감정이 머물 수 있는 자리. 지금은 알고 있다.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한 칭찬과 위로를, 이제라도 나 자신에게 건네야 한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서툴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일, 실수한 나를 감싸 안는 일, 억울한 마음을 내 말로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연습해보려 한다. 오늘 하루, 하나의 문장을 나에게 건네는 일. “그럴 수 있어.” “수고했어.” “네가 겪은 건 가벼운 일이 아니야.” 그렇게 아주 작은 문장부터 내 안의 얼어붙은 마음을 조금씩 녹여보려 한다.
어머니가 그 시절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것처럼, 나는 오랫동안 나를 돌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괜찮지 않은 날을 인정하고,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언어가 감정을 감추는 도구가 아니라 감정을 살려내는 다리가 되도록, 오늘도 나는 조심스럽게 연습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리고 그 말이 진짜가 되기 전까지, 나는 나를 계속해서 불러낼 것이다. “괜찮지 않은 너, 여기 있어도 된다”고.
김담이, 소설가이며 동화작가 (12월 23일 생). 대전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국제신문 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30회 눈높이아동문학대전 아동문학 부문 대상 수상. 2023년 12월 첫 번째 장편동화 『올해의 5학년』 출간. 2024년 11월, 소설집 『경수주의보』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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