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노하연 기자] 국제사법재판소(ICJ)가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국가는 국제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국가의 기후위기 책임 관계를 해석한 첫 국제법상 판단이다.

23일(현지시간) AP·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네덜란드 헤이그 법정에서 열린 심리에서 이와사와 유지 ICJ소장은 15명의 재판관을 대표해 “(기후위기는) 자연 생태계와 인간 사회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이 영향은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긴급하고 존재론적인 위협”이라며 “기후변화 협약은 각국에 엄격한 의무를 부과하며 이를 지키지 않는 건 국제법 위반”이라는 권고적 의견(advisory opinion)을 밝혔다.

ICJ 법정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ICJ 법정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유지 소장은 “국제법상 위법 행위를 저지른 데 따른 법적 결과에는 피해국에 대한 완전한 배상이 포함될 수 있다”며 피해와 불법 행위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입증된다면 국가 간 손해배상 청구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ICJ는 이번 권고의견에서 깨끗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을 ‘인권의 일부’로 선언했다. 유지 소장은 “환경은 인간 삶의 기반이며 현재와 미래 세대의 건강과 복지는 모두 여기에 의존하고 있다”며 “환경보호는 인권 향유를 위한 전제조건이며 이러한 인권 증진은 유엔 헌장 제1조 3항에 명시된 유엔의 목적 중 하나”라고 말했다.

2019년 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의 로스쿨 학생들이 기후 변화로 인해 국가 전체가 수몰 위기에 처하자 ICJ에 법적 판단을 물었다. 이들이 자문 의견을 구하기 위해 국제 캠페인을 벌인 끝에 2023년 3월 유엔총회가 ICJ에 ‘권고적 의견’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2024년 12월 ICJ는 2주간의 심리를 통해 98개국 정부와 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12개 국제기구의 의견을 청취했다. ICJ의 권고적 의견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각국 정책 결정이나 국내외 법원 판결, 국제법 해석의 기준으로 활용될 수 있다.

랄프 레겐바누 바누아투 환경장관은 이날 헤이그 법정 밖에 기자들과 만나 “이번 결정은 기후 대응에 획기적 이정표”라며 “이는 기후 문제의 심각성과 더불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이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의견 청취 과정에서 선진국들은 1992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과 이를 구체화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파리협정)으로 법적 의무는 충분하다며 그 이상의 법적 의무를 지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태평양 섬나라와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이 온실가스 감축에 구속력 있는 조치를 취하고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고 맞섰다.

기후변화(CG) [연합뉴스TV 제공]
기후변화(CG) [연합뉴스TV 제공]

외신은 권고 의견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뉴욕타임스는 “글로벌 환경 운동가들과 가장 큰 피해 위험에 처한 국가들을 위한 중요한 순간”이라며 “기후 변화 관련 소송이 증가하고 있는 전 세계 지방 법원의 절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로이터는 “이번 판결은 많은 이들의 예상보다 강력했지만, 그 영향력은 제한될 수 있다”며 “이는 세계 역사상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이자, 현재 기준으로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배출하는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체제 하에서 모든 기후 규제를 철회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로이터는 “항상 그래왔듯 트럼프 대통령과 행정부는 미국과 미국인 이익을 우선시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는 테일러 로저스 백악관 대변인의 답변을 덧붙였다.

BBC는 “국가들이 기후 변화와 관련해 서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여기에는 과거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책임도 포함된다”며 “ICJ의 의견은 권고적이지만 이전 ICJ의 결정은 정부에 의해 이행된 바 있다. 영국이 지난해 차고스 제도를 모리셔스에 반환하기로 합의한 것도 포함된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결정은 서구 전역에서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정치적 의지가 약화되는 시점에 내려졌다”고 짚었다. 워싱턴포스트는 “2년 전, 각국은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기로 약속했지만 많은 부유한 국가들이 석유 시추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며 “반면 취약한 국가들은 기후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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