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지난달 27일 발표된 에스파의 첫 번째 싱글 ‘Dirty Work’의 MV에서 지배적인 것은 흙과 돌, 그리고 물의 이미지다. 에스파는 ‘쇠 맛’이란 콘셉트로 브랜드를 구축했지만 MV에선 쇠의 존재와 형상은 그다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촬영장 당진 제철소의 흙가루가 날리는 허연색 벽과 바닥이 배경으로 나오고 화면에선 물방울이 떠돈다.

흙과 물을 합치면 진흙이 된다. 이 진흙이 싱글의 테마 ‘Dirty’를 표현하는 대상이다. 에스파 멤버들은 흙탕물이 되직한 진흙탕 위에서 뒹굴며 얼굴과 머리카락을 오염시킨다. 몸을 사리지 않는 이 장면은 영상의 에센스인 동시에 이번 싱글이 그들에게 갖는 의미를 품고 있다.

싱글 '더티 워크' 발매한 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싱글 '더티 워크' 발매한 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쇠 맛’은 말 그대로 쇳소리가 들리는 듯한 에스파의 음악성을 묘사하는 슬로건이다. ‘Dirty Work’는 나직한 사운드지만 한층 청각을 긁듯이 표현된다. 보컬에선 은은하지만 분명한 금속성 질감이 들린다. 일반적으로 믹싱 과정에서 이퀄라이저로 10000 헤르츠 이상의 고음역대를 과도하게 부스트할 때 나타나는 특징이다.

‘Dirty Work’는 소리와 이미지 모두 그동안 에스파가 보여준 콘셉트를 점성과 밀도를 높여 흘러넘치도록 퍼 담은 양동이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확보한 영역의 가장자리에 이르는 경계까지 나아간 것인데, 이런 과잉과 불균형은 에스파를 이뤄 온 정체성이기도 하다. ‘Dirty Work’ 가사의 “돌연변이” “오답” 같은 단어로 상징되는 예외성과 이질성이자, 정해진 규율을 무시하고 거스르는 이단성이다.

에스파의 커리어는 이수만 SM 체제의 초기와 탈 이수만 체제의 중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사운드는 전형적인 걸 크러시 풍의 요란한 음악이었다. ‘광야’라는 콘셉트는 가상세계의 캐릭터가 병존하는 키치한 세계관이 이질성을 이루며 에스파스러움의 밑바탕을 닦아 놓았다. 그것이 교체된 중기의 콘셉트가 바로 ‘쇠 맛’이다. ‘쇠 맛’은 광야의 이질성을 음향과 이미지로 번안한 버전이다. 이때 에스파가 거스른 규율은 케이팝을 획일화하던 ‘이지 리스닝’ 사운드였다.

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재작년의 ‘Spicy’는 회사 체제가 바뀌는 과도기에 나온 타이틀 곡으로서 상업적 안정성을 택한 만큼 특유의 정체성은 희석되었다. 하지만 이후 발표한 ‘Drama’는 다른 걸그룹들이 잔잔한 소리로 선회하던 때에 더 소란스러운 소리를 터트리며 시류를 역류하는 선택이었다. 광야의 사운드로 돌아가는 한편 세계관의 직설화법과 유영진 프로듀서의 음악적 터치는 잘라냈다. 에스파의 ‘쇠맛’은 어두운 무드와 박자의 역동성은 지켜내고 소리의 세기를 낮춰 세련되게 정돈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광야의 키치함은 그로데스크와 사이버 펑크를 버무린 Y2K로 변환되며 정체성이 지속됐다. 그것이 ‘Armageddon’에서 ‘Whiplash’로 이어지는 상업적 성공을 이루며 에스파의 두 번째 단락이 완성된 것이다.

‘Dirty Work’가 경계에 있다고 한 것은 그런 콘셉트의 속성을 과잉 증폭하며 또 다른 단락을 넘어다보고 있다는 직감이 들기 때문이다. ‘쇠 맛’으로 압축된 에스파의 정체성은 한층 연마된 금속성 음향과 오염된 이미지의 파격이 결합해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이 과잉은 반복이 아니라 커리어의 '넥스트 레벨'을 예고하는 징후처럼 보인다. 예쁘거나 멋있는 아이돌을 넘어 용모에 더러운 것을 묻히는 것도 개의치 않는, 더러운 일을 하는 것을 불사하며 스스로의 규율에 헌신하는 고혹적인 성숙의 캐릭터다. 그것은 케이팝이 빚어 온 깨끗하고 반질거리는 이미지에 대한 전략적 저항을 곁들인 '반(反) 청결의 미학'이라 부를 만하다.

싱글 '더티 워크' 발매한 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싱글 '더티 워크' 발매한 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걸그룹은 이미지 변화의 요구가 적은 보이그룹과 달리 연차가 쌓이며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을 변화시켜야 하는 압력과 직면한다. 보통은 이전보다 농익은 무드를 선보이는 선택을 한다. 과거에는 청순한 그룹이 소위 ‘섹시 콘셉트’를 가미하는 방식이었고, 언젠가부터 걸 크러시가 대안적 모델로 제시되었다. 반면 에스파는 콘셉트를 교체하는 대신 콘셉트의 밀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길을 만들어 간다. 자신만의 정체성을 다지고 심화하며 쉼 없이 바뀌는 케이팝의 시간을 통과해 간다. 2020년대에 데뷔한 이른바 4세대 걸그룹이 커리어의 중반을 지나가는 지금, 그들보다 한 발 앞서 데뷔한 에스파가 제시하는 새로운 모델이다.

처음의 나, 이전까지의 나와 다른 누군가가 되지 않고도 나를 이루는 요소들을 더 깊숙이 밀고 나가며 진화할 수 있다. 이것이 에스파의 첫 번째 싱글이 다른 그룹들에게 보여주고 입증하는 명제다. 모든 것이 수치로만 평가받는 케이팝 산업이지만, 에스파가 이뤄내는 일들의 문화사적 의미는 더욱 조명되고 탐구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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