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에스파의 신곡 ‘Rich Man’을 처음 들었을 때, 제목이 왜 Rich Man인 걸까 생각했다. 가사에는 부유한 이미지가 표현되지 않았고, 남성 형 명사를 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저 말이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 셰어의 예전 인터뷰에서 인용한 말이란 걸 알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이제 그만 정착하고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하라고 충고하자 ‘엄마, 내가 바로 부자예요(“I am a rich man”)’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다. ‘Rich Man’의 도입부에는 이 대화가 변주되어 독백으로 흘러나온다(“My mom said to me, “Find someone who can give you everything” And I said, “Mom, I already have everything”).
그럼에도 미진한 기분이 가시지는 않았다. 에스파는 한 인터뷰에서 “나 자신을 믿고 사랑하면 내가 바로 부자라는 뜻”이라고 말했지만, rich라는 단어는 이 메시지와 작위적으로 연결된 것 같았고 여전히 가사 속에서 겉돌고 있었다. 의아함은 이 노래에 원곡이 있다는 걸 알고 비로소 씻겨 나갔다. 작년에 kanner라는 가수의 이름으로 발표된 동명의 노래인데 이 노래를 SM 측이 구매한 것으로 보인다.
![걸그룹 에스파 미니 6집 '리치 맨' [SM엔터테인먼트 제공]](https://cdn.mediaus.co.kr/news/photo/202509/314655_225351_916.jpg)
kanner의 ‘Rich Man’ 도입부에선 셰어의 인터뷰가 직접 인용돼 있다. 여성의 자기애를 물질적 자기 과시로 포효하고, 결혼 제도로 상징되는 남성의 전통적 지위를 거침없이 비난한다. SM은 이런 알맹이와 뉘앙스를 모두 덜어냈다. 가부장제도와의 대결도 존재하지 않고, 물질적 단어를 차용하면서 구태여 정신적 가치를 말하기 때문에 레퍼런스가 녹아나지 않은 것이다.
노래의 사운드도 그렇다. 원곡에선 시종일관 으르렁대는 일렉 기타와 무거운 드럼 소리의 공격적인 편곡이 이어지고 보컬 역시 통렬하게 발성된다. 에스파 버전에선 악기와 목소리가 말끔하게 정돈돼 있어 날 것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후렴 멜로디의 흥겨움이 부각돼 친숙한 느낌을 자아낸다. ‘Rich Man’은 락 사운드를 차용한 무난한 케이팝 트랙이 되었다.
에스파의 콘텐츠를 즐기는 묘미는 콘셉트 연출이든 비주얼 아트든 사운드 구성이든, 어떤 차원에서든 통속성에 반해 밸런스를 깨트리는 일탈적 기획에 있었다. 그 점이 에스파를 기성품과 차별화하고 별난 고집의 장인이 빚은 공예품처럼 보이게 했다. 때문에 에스파의 행로를 지지하고 격찬하는 글을 여러 번 써 왔다. 이번 앨범은 아이코닉한 레퍼런스와 도발적인 원곡을 구조물로 쌓았음에도 평범하고 안전하다. 솔직한 인상을 말하면 예전보다 재밌지가 않다.
![걸그룹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https://cdn.mediaus.co.kr/news/photo/202509/314655_225352_934.jpg)
에스파의 이번 활동은 북미진출이란 목표가 명확하다. 영어 가사 비중이 크고, MV에선 미식축구와 글로벌 시상식 포토존 같은 북미적 이미지가 쇄도한다. ABC 방송 프로그램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했고 제니퍼 허드슨 쇼 출연도 예고돼 있다. 서구에서 밈처럼 통하는 셰어의 인터뷰를 빌려 온 것도 현지 친화력을 높이고 쇼츠 영상을 통해 또 다른 밈을 파생시키고픈 바람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Rich Man’은 서구에서 유통되는 콘텐츠들에 비해 앞서 가는 요소가 없는 것은 물론 그들의 정서나 트렌드에 편승하지도 못한 것 같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주제의식이다. 셰어의 인터뷰는 단순히 경제적 능력을 과시한 것이 아니다. 부유한 사회적 주체라는 남성 형 명사의 자리를 여성이 점령하고 전복하는 선언이고 그래서 듣는 이에게 반사적 카타르시스를 준다. kanner의 ‘Rich Man’은 이 문맥에 깃든 젠더적 저항의식을 걸걸한 직설화법으로 떠든다.
에스파의 ‘Rich Man’은 주체적 여성이 아니라 자립적 여성이다. 남자에게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를 ‘캐리’하는 존재가 예찬된다. 여기엔 여성의 자립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긴장감이 소거돼 있다. 여성을 독립적으로 묘사하지만 실은 남성들이 요구하는 ‘개념녀’ 판타지가 투영돼 있다. 남자가 벌어 오는 돈이나 쓰고 힘든 일은 남자에게 떠넘기는 여자들과 대비되는 존재다. 에스파 멤버들은 MV에서 미식축구 선수, 자동차 정비공, 목공, 농부로 분해 육체를 쓰는 남성적 직업을 수행한다. ‘직장에서 생수통 교체는 남자만 하고, 여경은 현장에서 몸을 사리는’ 한국 남성들의 세계관에서 본보기가 되는 기특한 여자다.
![에스파 '리치 맨' 뮤직비디오 티저 영상 갈무리 [SM엔터테인먼트 제공]](https://cdn.mediaus.co.kr/news/photo/202509/314655_225353_957.jpg)
주체적 여성과 자립적 여성은 다르다. 전자가 타인의 인정에 기대지 않고 존립하며 젠더 현실에 맞선다면, 후자는 젠더 현실이 소거된 자립의 환상을 재현하고 그를 통해 남성들의 인정을 얻는다. ‘Rich Man’뿐 아니라 케이팝 신에서 나온 ‘알파걸’ 찬가는 저 옛날 미스에이의 ‘남자 없이 잘 살아’부터 후자의 함정에 포획된 노래가 대부분이다. 분명한 건 이것이 동시대의 진보적 관념과 동떨어진 재현이라는 사실이다. 원곡의 맹렬함을 두루뭉술하게 갈아낸 편곡과 조응하는 상태이며, 해외/여성 팬덤은 물론 국내 남성 여론의 입맛도 돋우려는 셈법이 낳은 결과물 같다.
에스파의 새로운 앨범은 여러 면에서 보수화했다. 단순히 원래 보여주던 걸 보여주지 않아서 아쉽다는 것이 아니라 타협의 흔적이 지금껏 쌓아온 정체성보다도 짙어 보이기 때문에 아쉽다. 에스파가 특별했던 건 시장의 리스크를 일정 부분 껴안는 선택을 감행하며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이다. 매출액과 정체성의 차별화, 팬덤의 충성과 그 밖으로의 확장성, 국내 여론의 지지와 해외 시장 실적, 마지막 기회의 땅으로 떠오른 북미에서의 성공, 글로벌 스탠더드와 사회문화적 현실에 대한 이해… 케이팝은 이 모두를 두루 고민해야 하는 머리 아픈 산업이 되었다. 이것을 모두 충족하는 그룹은 사실상 거의 없다. ‘Rich Man’은 그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내닫는 대다수 케이팝 그룹의 곤경이 드러난 사례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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