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SM 엔터테인먼트 걸그룹 에스파가 7월 8일 컴백한다. 현재 선주문 100만 장을 넘는 등 기록적 수치로 파괴력을 예고하고 있다. 어쩌면 블랙핑크가 보유한 역대 걸그룹 초동 앨범 판매 기록 68만 장을 넘을지도 모른다.

에스파는 이른바 ‘4세대 걸그룹’ 대표주자다. 2020년 연말에 데뷔한 에스파가 어느새 케이팝 최고의 걸그룹 중 하나로 비상하게 된 날개는 ‘Next Level’이다. 데뷔 싱글 ‘Black Mamba’는 히트하지 못했고 멤버들 아바타를 내세운 콘셉트는 생소했다. 당시 유행하던 걸 크러시 계열 걸그룹들 노래 사운드와 변별점이 없던 ‘Black Mamba’와 달리, 다음 싱글 ‘Next Level’에선 노래 구성을 랩 중심으로 바꾸며 변신을 꾀했다. 단박에 주의를 환기하는 인트로 사운드와 중독적인 랩 후렴구, ‘디귿 춤’으로 불리는 포인트 안무가 선풍을 일으켰다. ‘광야’로 대표되는 세계관을 코믹스 스토리처럼 써 내린 독특한 가사도 랩으로 재현되며 전달력이 높아졌다. ‘Black Mamba가 만들어 낸 환각 퀘스트’ 같은 키치한 표현이 사람들 귀에 또박또박 가 박혔다.

에스파 '코첼라' 공연 모습. [SM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에스파 '코첼라' 공연 모습. [SM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Next Level’은 음원 차트의 ‘대중성’이 사라진 시대에 어떻게 아이돌 노래가 ‘대중적’으로 흥행할 수 있는지 보여준 케이스다. 독특한 세계관 아래 가사, 사운드, 안무, 비주얼 콘텐츠 등 모든 요소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조립되어서 총체적인 유행을 일으켰다. 강한 ‘오타쿠'적 요소, 하위문화적 요소가 세련된 양식으로 제작되는 것이 에스파의 정체성이고 여타 걸그룹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이런 요소들이 ‘일반인’들에게 신선함을 주는 ‘입덕 포인트’가 되고 팬이 된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세계관의 퍼즐이다. 확실히 이런 점에서 에스파는 다른 ‘4세대 걸그룹’들에게 레퍼런스가 됐다. 최근 데뷔하는 걸그룹은 콘셉츄얼한 성격이 강하고, 뚜렷한 세계관이 안 보이는 그룹마저 심오한 세계관이 있는 것처럼 아이돌 커뮤니티에서 ‘영업’을 한다.

다만 저 ‘4세대 걸그룹’이란 명찰을 좀 뒤집어 봐야 한다. 누가 처음 쓴 건지 출처를 찾기 힘들지만, 걸그룹을 세대로 구분하던 팬들의 입버릇이 4세대까지 이어지고 언론에서 받아쓰며 보편적인 개념이 된 것 같다. 대체로 2018년부터 데뷔한 걸그룹들이 4세대라 불리며 이전에 데뷔한 그룹들과 구분된다. 사실 3~4년, 1~2년 차이로 ‘세대’를 나누고 그 짧은 시간마저 쪼개서 2.5 세대, 3.5 세대까지 나누는 건 별다른 설명력이 없고 세대의 뜻을 과용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세대 나누기는 케이팝 신뿐 아니라 한국 힙합 신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앞서 말한 이유로 평론가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케이팝 신이든 힙합 신이든, 20년 정도로 역사가 짧고 변화가 빠른 장르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들 세대를 나누는 문화가 생긴 것 같다.

그렇다고 ‘4세대 걸그룹’들을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3세대니, 4세대니 하는 그룹들이 품은 공통된 특질이나 그때그때의 트렌드는 있다. 하지만 그건 ‘세대’라고 불리는 개별 그룹들로 환원되지 않는 경향이다. 그 특질을 부른 변화나 환경에 주목해야 한다.

2010년대 중반 데뷔한 ‘3세대 걸그룹’은 멤버 수가 많았고 9인, 12인, 13인조까지 있었다. 이들은 ‘컬러팝’ 혹은 ‘모두가 센터’라는 슬로건으로 특정한 간판 멤버 대신 많은 멤버가 보여주는 조화와 케미스트리를 밀었다. 팬들이 사랑하는 ‘최애’가 돌아가면서 바뀌는 ‘회전문’ 문화가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콘셉트가 강조됐고, 국내 남성 팬들이 걸그룹 코어 팬덤으로 진입한 시기였고, 대면 이벤트 및 브이 라이브와 자체 콘텐츠를 통한 친밀한 소통이 마케팅 수단이었다.

반면 ‘4세대 걸그룹’은 4인에서 6인 정도 소규모 구성이 주류다. ‘컬러팝’에서 ‘걸 크러시’로 트렌드가 바뀌었고, 귀여운 여성상이 멋있는 여성상으로 교체됐다. 확실한 간판 멤버를 육성해서 그룹 전체가 낙수 효과를 받는 방식으로 운영이 바뀌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독자적 세계관을 갖추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산업 환경, 나아가 사회 환경이 변했기 때문이다.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미국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앨범 공구 증가와 SNS 고도화로 해외 시장은 갈수록 확장됐고 앨범 판매량이 폭증했다. 인터넷 방송 여자 스트리머 시장이 발달하면서 ‘귀여운 여성상’과 친밀한 소통을 걸그룹에서 찾던 남자 팬들에게 더 구미에 맞는 대안이 제시됐다. 걸그룹 산업은 한층 서브컬처가 됐고 국내 걸그룹 팬덤 규모가 축소되는 동시에 여초화됐다. 같은 기간 동안, 사회문화적으로 주체적 여성상이 화두가 되며 여성 소비자들은 문화 산업에서 자신들을 투영할 수 있는 여성 캐릭터를 찾았고 이들의 수요가 걸그룹 산업에 반영됐다. 이건 세련되고 트렌디한 여성상을 선호하는 서구, 중국 등 해외 팬덤의 수요와 맞아떨어졌다. 걸 크러시는 국내와 해외 소비자 모두를 충족하는 대안이 됐다.

한편 최근 대변 이벤트가 재개되기 전까지 오랜 팬데믹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국내 오프 행사를 단절하며 온라인 비대면 콘텐츠가 메인 상품이 됐었다. 케이팝 산업과 국내 소비자의 거리는 멀어지는 한편 해외 소비자와의 거리는 가까워졌고 이상의 변화가 촉진된 것이다. 팬과 아이돌의 물리적 거리감이 커지고 걸그룹 콘셉트가 걸 크러시로 변하며 아이돌의 이미지도 변했다. 내가 만날 수 있는 친근하고 심지어 만만한 존재, ‘십덕’이란 속어로 표현되는 존재에서 멀리서 지켜보는 반짝이는 존재, ‘우상’의 사전적 정의대로 돌아간 면이 있다.

정리하면, 걸그룹 산업의 현주소는 국내 시장에 대한 해외 시장, 남성 팬덤에 대한 여성 팬덤의 우위와 프리티 콘셉트에서 걸 크러시 콘셉트, 다인조 그룹에서 소규모 그룹, 대중문화에서 하위문화로의 변화, 앨범 판매량 증가와 완전한 팬덤 산업으로의 재편이다. 이것이 흔히4세대 걸그룹’이라 부르는 그룹들의 교집합이자 탄생 배경이다. 단순히 데뷔시기를 가지고 족보를 나누어서는 이런 산업의 좌표와 그걸 둘러싼 변화를 인식할 수 없다. 더구나 저런 교집합은 꼭 세대를 경계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다. ‘3세대 아이돌’로 구분되는 블랙핑크는 저 모든 요소를 활동 모델로 보여준 그룹이고, ‘3세대 아이돌’ 중에도 레드벨벳처럼 ‘4세대 아이돌’에 더 가까운 그룹이 있으며, ‘4세대 아이돌’ 중에도 케플러처럼 ‘3세대 아이돌’ 모델에 해당하는 그룹이 있다. 세계관 장착과 팬덤 산업화 역시 특정 시기를 경계로 갑자기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그룹 레드벨벳. [SM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그룹 레드벨벳. [SM엔터테인먼트 제공=연합뉴스]

무엇보다도, 걸그룹 산업의 변화는 ‘4세대’ 이전에 데뷔한 그룹들에게도 현재 진행형으로 작용하고 있다. 케이팝 산업에서 걸 크러시가 주류가 된 후 일어난 변화를 꼽자면 걸그룹에 가해지던 연령 대상화가 해제되고 있단 사실이다. 멋지고 동경할만한 여성상이 주류가 되면서 걸그룹 이미지 소비 수요가 미성숙함에서 성숙함으로 바뀌었다. 레드벨벳은 주축 멤버들 나이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이지만 쉼 없이 컴백하고 있다. 올 상반기에는 자체 초동 앨범 판매량을 두 배가량 경신하며 사십만 장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한때는 걸그룹은 어려야 한다는 관념을 쫓아 경쟁하듯 데뷔 연령이 낮아졌고 나이가 어릴수록 주목받는 작태가 있었다. 그건 물론 여성의 나이에 대한 사회적 대상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강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연차가 오래됐다는 건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코어 팬덤을 뿌리 깊게 축적했단 뜻이니까.

현재 케이팝 산업에서 주목하고 싶은 건 헤드라인에 난무하는 ‘4세대 걸그룹’ 같은 신조어가 아니다. 레드벨벳은 데뷔 8년 차에 커리어 하이를 쓰고 있다. 트와이스는 아시아 중심으로 활동하다 데뷔 7년 차에 북미 투어를 성황리에 마치며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열세 살에 일본 아이돌로 데뷔한 미야와키 사쿠라는 데뷔 7년 차에 케이팝 아이돌로 전업하고 데뷔 11년 차에 다시 한번 ‘4세대 아이돌’ 르세라핌으로 데뷔했다. 끊임없이 커리어를 개척하는 여성 아이돌들은 케이팝이 가보지 않았던 미지의 경계로 발을 내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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