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형주 칼럼] 한국 산업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한편으로는 제조업 기반의 국가 경쟁력을 지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의 기후위기 대응 흐름에 발맞춘 탄소중립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 두 과제 모두 결코 선택이 아닌 필수이지만, 현실에서는 이 둘이 충돌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 갈등이 지금 산업 현장에서 여러 난맥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국내 철강업계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탈탄소 전환의 핵심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차세대 전략기술로 육성하겠다는 의지와 달리, 기업 현장의 반응은 신중하다. 수조 원에 달하는 설비 전환 비용, 청정수소의 수급 불안정, 전력요금 인상 등으로 인해 쉽게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기술 전환이 늦어지면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로 인해 수출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지만, 성급히 움직이면 생존 기반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산업계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탄소중립 (PG) [연합뉴스 자료사진]
탄소중립 (PG) [연합뉴스 자료사진]

탄소중립 대응은 이미 수출 산업 전반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EU는 철강, 알루미늄, 시멘트 등 고탄소 품목에 대해 탄소 배출량에 따른 관세를 부과하고 있고, 국내 기업들은 이에 대응할 탄소배출 데이터 시스템, 감축 기술, 인증 체계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태다. 수출 기업 입장에서는 탄소 비용 증가뿐 아니라, 생산기지의 해외 이전 가능성까지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정책이 산업 현장의 여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 탄소중립은 전환의 동력이 아니라 경쟁력 저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요국들은 산업기반을 지키면서도 기후목표를 이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일부 국가는 이를 성공적으로 조율하고 있다. 독일은 에너지전환(Energiewende) 정책 아래 석탄 산업을 점진적으로 줄여가면서, 공공조달과 연계한 수소, 풍력, 배터리 등 신산업 기반을 조성하며 산업 전환을 유도했다. 덴마크는 분산형 재생에너지의 수익 모델을 보장하고, 전력요금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 민간의 수용성과 투자 안정성을 확보했다. 이런 사례들은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탄소중립과 산업경쟁력은 상충되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굴러야 하는 두 개의 바퀴라는 점이다.

한국은 특히 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고, 제조업이 GDP와 수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경제 구조에서 탄소중립 전환 실패는 곧 국가경쟁력 약화로 직결된다. 반면 전환을 제대로 설계하면, 고부가가치 녹색산업과 신기술을 선도하는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철강, 화학, 반도체, 배터리 등 한국의 주력 제조업들은 이미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 공급망 실사법 등 글로벌 규제의 정면 압박을 받고 있으며, 기술 수준만으로는 이를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스템 전환과 구조 혁신 없이는 도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TV 제공]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산업경쟁력과 탄소중립을 대립적으로 보아선 안 된다. 오히려 두 목표를 통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첫째, 한국형 산업생태계를 해외에 이식하고, 녹색 인프라와 통합해 수출하는 전략이 유효하다. 동남아, 중앙아시아, MENA 지역의 산업단지와 연계해 한국의 배터리, 철강, 전자산업 기술을 현지에 이전하고, 동시에 RE100 대응형 재생에너지 설비와 ESS, 스마트 유틸리티 시스템을 함께 수출할 수 있다면, 이는 단순한 제조업 이전이 아닌 녹색 산업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 국제감축(ITMO) 기반의 탄소감축 실적 확보가 요구된다. 파리협정 제6조는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온실가스를 줄인 실적을 국내 감축 실적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 제도의 활용도가 낮다. 앞으로는 ITMO를 기업의 감축 수단, 배출권 확보, 수출경쟁력 확보의 전략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정책적·제도적 기반 정비가 절실하다. 고탄소 제조업의 탈탄소 전환은 민간만의 책임으로 둘 수 없다. 기술–재정–정책이 통합된 형태의 정부 지원 체계가 필요하며, 공공조달 기반 실증 확대, 기술–시장–투자 연결 구조, 예측 가능한 탄소정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정부는 대통령실 직속 TF 설치, 해외사업청 신설 등을 통해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고, 민간·공공의 글로벌 협력 추진 체계를 조성해야 한다.

넷째, 에너지 기반 인프라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 PPA, 분산형 발전, ESS 및 수요관리 산업 확대 등을 통해 산업단지 중심의 에너지 전환 모델이 현장에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전력요금 체계의 합리화와 예측 가능성 제고는 기업의 투자를 유인할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마지막으로, 지정학적 리스크 대응과 기후외교 리더십 확보가 요구된다. 미중 전략경쟁과 보호무역주의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기술 기반의 기후외교 전략을 통해 글로벌 파트너십을 확대하고, 개도국과의 정책·기술 연계를 강화해야 한다. 국제 감축사업, 녹색공공조달, 탄소저감기술 이전 등을 통한 기후 연대가 새로운 외교 자산이 될 수 있다.

신재생 에너지 (PG) (연합뉴스)
신재생 에너지 (PG) (연합뉴스)

탄소중립은 우리 산업을 억누르는 족쇄가 아니라, 산업 고도화와 국가 경쟁력 재설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단기적 비용에만 매몰되지 않고, 중장기 전략을 바탕으로 실행력을 갖춘 이중 전환 체계가 요구된다. 지금이야말로 산업경쟁력과 탄소중립이라는 두 바퀴를 함께 돌려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속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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