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박진우 칼럼]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날씨는 여전히 덥다. 이 찜통더위의 수준이 가히 ‘역대급’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별로 틀린 것 같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1994년 여름, 2018년 여름과 비교하여 자신이 겪은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필자 역시 그렇다.

대학생 시절 옥탑방에서 선풍기 한 대로 버텨냈던 1994년 여름은 지금도 젊은 시절의 악몽 중에서 손꼽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필자의 많은 동년배들에게 그럴 것이다. 게다가 1994년 여름은 요즘처럼 시국도 정말 어수선했다. 한반도 전쟁 위기에, 남북정상회담 타결 소식에, 또 김일성 사망과 몰아친 공안정국으로 얼룩졌던 해가 바로 1994년이었다. 1학기 종강 수업에서 ‘혹시 전쟁이 나더라도 여러분들은 절대 거기 끌려가지 말고 다음 학기 꼭 다시 만나자’는 어느 교수님의 말씀도 기억이 난다).

1994년 여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 더위가 이제는 어쩌다 한 번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체념 혹은 운명적인 태도를 모두들 가지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미국처럼, 대선에 다시 나선 트럼프 후보처럼, 기후 위기란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여전히 주장하는 모습은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논의들을 국내 언론이 소개하기도 전에, 찌는 듯한 폭염과 수해의 참상, 초강력 태풍의 위협적인 경험이 우리의 몸에 생생하게 각인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모두가 해마다 점점 더 여름을 버티기 어렵게 되었다는 나름의 기억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설사 우리들 대부분은 작년 여름에 비가 얼마나 왔었는지를 잘 기억하지는 못함에도 말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제 ‘기후 위기’라는 말 자체의 정당성은 한국에서는 별달리 부인되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서울 지역 낮 최고 기온이 35도를 기록하는 등 폭염이 계속되고 있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햇빛 가리개 그늘 아래에서 시민들이 햇볕을 피하고 있다. 열화상 카메라 모듈로 촬영한 이 사진에서 온도가 낮은 부분은 파랗게, 높은 부분은 붉게 표시된다. (서울=연합뉴스)
서울 지역 낮 최고 기온이 35도를 기록하는 등 폭염이 계속되고 있는 19일 서울 광화문광장 햇빛 가리개 그늘 아래에서 시민들이 햇볕을 피하고 있다. 열화상 카메라 모듈로 촬영한 이 사진에서 온도가 낮은 부분은 파랗게, 높은 부분은 붉게 표시된다. (서울=연합뉴스)

그렇지만 오늘날 언론 보도에서 기후 위기는 한편으로는 남용(?)되고 있다. 한국 언론은 어느 순간 온갖 종류의 기상 이변, 무더위, 수해와 같은 현상 앞에 ‘기후 위기’라는 수식어를 관습적으로 붙이기 시작했다. 사과나 귤 농사가 이제 강원도에서도 가능하고, 동해안에서 오징어 대신 열대 어종이 잡힌다는 등의 소식들 역시 기후 위기라는 용어 하나로 쉽게 이해되어 버린다.

이러한 보도는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후 위기에 대한 우리의 무력감을 유발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더불어 기후 위기란 엄연히 원인을 제공하는 행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희석되어 버린다. 기후 위기란 어떤 형태로든 원인 진단과 해법 모색의 과정에서 사회적인 합의에 저절로 도달할 수 있는 – 과거 ‘공해 방지’, 혹은 ‘자연보호’와 같은 구호들처럼 – 그런 이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언론 보도에 대한 관심과 실천이 이제 필요한 시점이다. ‘탄소 자본주의’의 한계 지점, 탈성장주의와 탈인간중심주의를 축으로 삼은 글로벌 의제의 구체화, 그리고 기후 위기를 둘러싼 ‘글로벌 노스/사우스’의 관계와 같은 보다 사회정치적인 쟁점들이 기후 위기에 관한 언론 보도와 대중 담론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까? 기후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환경인 동시에 생활환경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의 하나이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모두에게 공평한 결과를 낳는 자연 현상이 결코 아니다. 그렇기에 기후 불평등의 문제는 불가피하게 새로운 인권 이슈이다.

8월 15일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8월 15일 SBS 8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이상 기후나 기상 이변의 발생 상황에서 취약계층인 이른바 ‘기후민감계층’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크게 나타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실질적인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평등권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는 새로운 관점이 사회적으로 절실하다. 나아가 기후 위기는 따라서 우리 헌법에도 규정되어 있는 기본권에 해당하는 요소이자 ‘평등권’의 요소로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평등권은 경제적 불평등과 직결된 문제이자 이들의 안전에 관한 권리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만큼, 기후 취약계층의 문제는 또한 사회적 기본권 혹은 ‘사회권’에 의해 해결되어야 하는 과제이다.

한국 언론은 아직 기후 위기의 문제를 불평등 해소와 인권에 결부된 정치적 정당성 획득의 사회적 과제로 적극 인지하고 보도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단지 기후 위기 보도의 방향 설정만으로 해결가능한 문제는 아니다. 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우리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담론들과 결부되어 비로소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한 단계로 한국 사회가 성숙할 수 있도록, 이제 기후 위기를 둘러싼 언론 보도의 퀄리티를 한층 높여 나가는 작업이 우리의 과제로 제기된다.

그리고 ‘기후 위기와 언론, 그리고 인권’이라는 과제는 향후 언론인권센터와 같은 시민사회의 주도 속에서 보다 정교화된 교육 및 실천 프로그램의 하나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특별히 길고도 지루한 올해 여름을 보내면서 새롭게 다짐해 보아야 할 일이라 하겠다.

☞  박진우 건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에서 발행하는 '언론인권통신' 제 1033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싣습니다.   

 ☞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미디어스’를 만나보세요~ 구독하기 클릭!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