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원 칼럼] 지인들에게 던진 농담 아닌 농담. “내년 지방선거가 6월이니 올해처럼 덥겠죠? 어느 단체장 후보가 ‘모든 주민 에어컨 무상 보급’ 공약을 내면 득표에 도움 될까요?”

즉시 반발이 따랐다. 너무 과도한 재정이 들 거라는 이유다. 대부분 가정이 에어컨을 쓰고 있어서 정책 차별성이 없다고 덧붙였다.

내용을 다듬어 다시 물었다. “에어컨 없는 사회적 약자 가정만 한정해 보급하면 어떨까요?” 이른바 ‘에어컨 선별 지원 정책’이다. 반발의 수위가 줄었다. 고민이 시작됐다는 증거다. 의견이 갈라졌다. 주목할 만한 두 가지 주장이 맞붙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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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개인 건강권 실현 VS 기후 위기 심화’다. ‘개인 건강권 실현’ 측은 폭염이 사회적 재난이기 때문에 필수품으로 에어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들은 에어컨을 구입하기가 비교적 어렵기 때문에 보편적 건강·안전권 실현을 위해 공공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후 위기 심화’ 측은 폭염이 사회적 재난인 것을 인정하지만 에어컨 보급 범위를 더 넓히면 탄소 중립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을 우려했다.

개인 건강·안전권의 전제는 삶의 지속가능성이기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후 위기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편하더라도 에어컨 사용 빈도를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진영은 다르나 본질은 같다. ‘인권’이다. 구체적으로 ‘보편적 인권 실현’, ‘지속 가능한 인권 보장’의 염원들이 서로 다른 주장과 제안에 담겼다.

툭하고 던진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치열하게 고민, 논쟁한 지인들에게서 폭염을 감수하고 노동 현장을 지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함께 마음이 따뜻해지는 대화였다.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9일 서울 종로구 쪽방촌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한 주민을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 온도가 높은 곳은 붉게, 낮은 곳은 푸르게 표시돼 있다. (서울=연합뉴스)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9일 서울 종로구 쪽방촌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한 주민을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모습. 온도가 높은 곳은 붉게, 낮은 곳은 푸르게 표시돼 있다. (서울=연합뉴스)

지인들과 헤어지고 포털에서 ‘에어컨 인권’을 검색했다. 난감하면서 흥미로운 뉴스가 바로 보였다. ‘윤석열 지지자들의 민원 폭주’다.

그들은 에어컨 없는 독방에 사람을 가둔 것이 인권침해라고 항의했다. 폭염이 본격 시작된 몇 주 전,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과포화된 구치소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아 수용자들의 인권이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더욱 혹독하다. 폭염을 온전히 감당하며 야외에서 일해야 하는 택배 및 건설 노동자들의 이야기, 에어컨 설치하다 열사병에 숨진 20대 청년 이야기 등을 접하며 인간과 제도의 무력감을 재확인했다.

에어컨을 둘러싼 다양한 소식과 비극들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지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풀어야 하는 극히 현실적이고 시급한 인권의 문제들이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질문을 다르게 해야겠다. 인권 실현의 주체는 인간인가 비인간, 정확히는 ‘에어컨’인가? 

폭염의 위력이 두터울수록 인권 실현의 주도권이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옮겨지는 흐름도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인간들이 지혜를 짜내 폭염 대책을 만들었다 한들 에어컨 한 대의 영향력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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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할 일이 분명해졌다. 인권 실현의 주체를 인간에서 에어컨 등 비인간으로 넓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간과 비인간이 연대하는 공론장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과 에어컨이 협력하는 가운데 건강·안전권을 실현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인간 중심의 시각을 바꿔야 한다. 에어컨이 인권 실현의 주체임을 인정하고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다음 ‘에어컨=인권’ 공식에 맞춰 사회적 약자들의 요구를 수렴하면서 약자들과 에어컨, 기후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현실화가 쉽지 않은 고차원, 고난도의 숙제다. 하지만 언론에서 지금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더욱 독해지는 폭염과 에어컨 바람 사이에 놓인 인권은 가혹한 시련의 소용돌이에 하염없이 휘말릴 것이다.

♣ 이정원 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제주한라대 방송영상학과 교수 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에서 발행하는 '언론인권통신' 제 1058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미디어스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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