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하종삼 칼럼] 원고의 순서는 먼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하 사전으로 표기함)의 목민심서 해설을 【】 안에 인용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 책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저자의 지방 행정의 원리는 관(官)의 입장에 서서 논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민(民)의 편에 서서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고발·탄핵·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1901년 광문사에서 인간(印刊)한 바 있으며, 1969년 민족문화추진회와 1977년 대양서적(大洋書籍), 1981년 다산연구회(茶山硏究會)에서 각각 국역이 간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57세 되던 해에 저술한 책으로서, 그가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에 집필하여 1818년(순조 18)에 완성된 것이다.

총평에 해당하는 첫 번째 문장은 목민심서를 좋게 해석하려는 의도로 보이나 객관적이지 못한 글이다. 이 문장은 언뜻 보면 맞는 말 같지만 목민심서를 설명하기에는 부적절하다. 

역주 목민심서 전면개정판 [창비 제공]
역주 목민심서 전면개정판 [창비 제공]

다산이 목민심서를 저술한 것은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들이 이 책을 참조하라고 쓴 것이다. 목민심서는 명확하게 수령의 관점에서 할 일을 정리한 책이다. 수령이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전체가 구성돼 있다.

이는 다산이 목민심서의 서문과 자찬묘지명에서도 분명하게 기록해둔 내용이다.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 있는 것만 해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있어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방법에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목민심서 서문>

 

“목민(牧民)이란 무엇인가? 오늘날의 법을 인하여 우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편(篇)마다 각각 6조씩을 통섭(統攝)하되 고금(古今)을 조사하여 망라하고, 간위(奸僞)를 파헤쳐 내어 목민관(牧民官)에게 주니, 한 백성이라도 그 은택을 입는 자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 용(鏞)의 마음이다.” <다산의 자찬묘지명>

그러므로 ‘사전’의 ‘관의 입장에 서서 논한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비록 지방행정의 원리라는 수식어가 있더라도 틀린 표현이다. 목민심서는 명백하게 관(官), 즉 목민관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백성들의 입장을 최대한 정책에 반영하고 있지만 서술의 주체는 관인 수령이다.

이어지는 ‘민(民)의 편에 서서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고발·탄핵·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표현 역시 부적절하다. 수령은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폭로, 고발, 탄핵, 경계하는 자리가 아니다. 관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근본적으로 차단하여 백성의 이익을 지켜내는 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것이 수령의 기본임무다. 조선시대의 수령은 삼권(三權)을 가진 존재다. 본인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폭로하고 탄핵할 일이 없다. 수령의 자리는 횡포와 부정부패를 했을 경우 폭로, 고발, 탄핵, 경계의 대상이 되는 위치지 탄핵하고 고발하는 위치가 아니다. 이 일을 하라고 따로 어사(御史)나 감사(監司)를 파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에 있는 ‘그가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에 집필하여 1818년(순조 18)에 완성된 것이다’는 문장은 안쓰럽다고 할까? 18년을 19년이라고 쓴 것은 앞에서 지적한 내용이니 지나가더라도 ‘신유사옥 때‘라는 표현은 정말 무성의하다. 이 문장대로 해석하면 신유사옥 때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다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야 ‘신유사옥으로 인해’ 혹은 ‘신유사옥 때문에’라고 자동번역이 되겠지만, 모르는 분들이 읽는다면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때 다산이 강진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한 글자의 오류가 이렇게 무섭다.

7일 중구의 한 식당에서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오른쪽)와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역주 목민심서' 개정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18.11.7 [창비 제공=연합뉴스]
7일 중구의 한 식당에서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오른쪽)와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역주 목민심서' 개정판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2018.11.7 [창비 제공=연합뉴스]

번역에 대한 설명인 ‘1981년 다산연구회(茶山硏究會)에서 각각 국역이 간행되었다.’는 글은 어떤 기준으로 1981년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다산연구회와 번역에 대한 소개는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역주 목민심서』의 자료에 잘 나와 있다.

고(故) 벽사 이우성 선생을 필두로 1975년 실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이 함께 원전을 읽고 토론해보자는 취지로 다산연구회 모임이 시작되어 『목민심서』 독회와 『역주 목민심서』 출간으로 이어졌다. 10년간 치밀하게 조사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역주에 힘을 쏟은 결과, 1978년 『역주 목민심서』(창작과비평사) 제1권을 간행한 이래 1985년 전6권을 완간했다. 그 기간 전체는 한국 실학사를 정립하는 과정이기도 했으며 다산연구회 회원들은 국학ㆍ실학ㆍ다산학의 최고전문가로서 자리매김되었다. 회원은 작고한 분으로 이우성(李佑成)ㆍ김경태(金敬泰)ㆍ김진균(金晋均)ㆍ박찬일(朴贊一)ㆍ성대경(成大慶)ㆍ정윤형(鄭允炯)ㆍ정창렬(鄭昌烈)ㆍ김태영(金泰永), 현재 활동하는 분으로 강만길(姜萬吉)ㆍ김시업(金時?)ㆍ송재소(宋載?)ㆍ안병직(安秉直)ㆍ이동환(李東歡)ㆍ이만열(李萬烈)ㆍ이지형(李?衡)ㆍ임형택(林熒澤) 등 16인이다.- <창작과 비평사 정선 목민심서> 

이 글에서도 명확하듯이 다산연구회에서 처음 번역본을 선보인 것이 1978년이고 완역한 것이 1985년이다. 이 소개 글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선생들은 80년 신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멤버 중 6명이 해직될 정도로 현실에서도 다산의 정신을 실천했던 분들이다. 송재소 선생에 따르면 어떤 날은 원고지 한 장도 다 번역하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게 토론하여 나온 결과물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역주 목민심서』다. 가장 완벽한 번역을 해놓았고 이제 제대로 쓰는 것은 후학들의 몫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사전 소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사전 소개

총체적으로 보면 ‘사전’의 목민심서에 대한 서술은 목민심서를 읽어 본 사람이 쓴 글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오류투성이고 문장의 구성이나 서술도 수준 이하이다. 한국학의 최고권위를 가진 기관이 아니더라도 이런 수준의 서술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이다. 다산은 과골삼천(踝骨三穿)하며 위대한 저작을 세상에 선보였고 열여섯 분의 다산연구회 선생들은 해직과 옥고를 감수하면서도 좋은 번역을 해 놓았지만, 이를 몰라보는 후손들의 처지가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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