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하종삼 칼럼] 원고의 순서는 먼저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하 사전으로 표기함)의 목민심서 해설을 【】 안에 인용하고 이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정약용의 목민에 대한 구상과 계획은 오래 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는 16세부터 31세까지 아버지가 현감·군수·부사·목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있을 때 임지에 따라가서 견문을 넓힌 일이 있었다. 자신도 33세 때 경기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 행정의 문란과 부패로 인한 민생의 궁핍상을 생생히 목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직접 찰방(察訪)·부사 등의 목민관을 지내면서 지방 행정에 대한 산 체험을 경험하였다.】

이 글은 다산이 무엇을 바탕으로 해서 목민심서를 저술했는지에 대한 설명인데 ‘글 전체’가 부적절한 표현이거나 오류에 해당한다.

먼저 ‘정약용의 목민에 대한 구상과 계획은 오래 전부터 싹트고 있었다’라는 표현이다. 초등학생용 위인전에 이런 설명을 해 놓았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여기는 한국학의 최고권위가 있다는 연구기관의 자료다. 명확한 근거가 없는 설명은 지양해야 한다. 글의 순서로 보면 부친이 목민관으로 나갔을 때 따라간 것과 암행어사시의 경험, 그리고 곡산부사시의 경험이 그 근거로 보이는데 이 역시도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다산이 말한 바와도 차이가 있다.

이어 다산이 ‘16세부터 31세까지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암선생연보에 의하면, 다산이 부친의 임지에 처음 따라간 것은 부친이 연천현감으로 부임했을 때인 6세부터, 예천군수로 부임했던 19세까지의 시기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는 마현과 서울에서 과거를 공부했고 22세인 1783년 성균관에 입학한다. 이어 28세인 1789년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선다. 28세 때 울산의 임소로 찾아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임지로 따라간다는 것과는 판이한 문제다.

즉, 31세까지 부친의 임지에 따라간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리라, 무엇보다 이 글은 다산의 기본적 목민관과도 어긋난다. 다산은 목민심서 율기 제가(齊家)에서 ‘어린 자녀가 따라가고 싶어 하면 인정상 말릴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서 결혼한 자녀들은 차례로 와서 뵙도록 하고 일시에 함께 오는 것은 좋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다산을 31세까지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가는 철없는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문장이다.

이어서 거론하고 있는 경기 암행어사의 행적도 사실에 부합하기는 하나 다산이 스스로 말한 목민심서의 서술과 관련해서는 적절한 인용은 아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 (사진= 2012년 한국고서연구회 창립 30주년 기념 '대한제국 도서전', 연합뉴스)
정약용의 목민심서 (사진= 2012년 한국고서연구회 창립 30주년 기념 '대한제국 도서전', 연합뉴스)

다산은 목민심서의 서문에서 책을 저술한 기초가 되는 세 가지 사안을 말한 바가 있다.

첫째로는 ‘아버지가 목민관으로 재임 시 보고 배운 바이며, 이를 본인이 곡산부사로 있을 때 시험해 성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부친의 행적을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다산은 특별하게 스승이 없이,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다니며 학문을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스스로 성호 이익의 글을 보고 학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다산의 스승이 아버지라는 의미다. 목민심서에서 다산이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의 대부분은 본인이 곡산부사 때 실시한 정책들이다. 다산이 서문에서 부친을 거론한 것은 이러한 정책을 시험할 수 있는 가르침을 준 스승 – 아버지에 대한 효(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핵심은 곡산부사 때 백성의 구제책으로 시행해서 효험을 본 정책들이다.

둘째, ‘중국과 조선의 모든 역사서와 자집(경전과 문집)에서 목민의 유적을 고찰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목민심서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목민심서에는 다른 실학자들의 개혁서에 비해 유학 경전과 고사에 대한 인용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이는 서학을 접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다산으로서는 성리학적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의미가 1차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왜 목민심서가 위대한 고전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지배층을 시험으로 선발하던 국가는 조선과 중국 그리고 베트남 이외의 국가는 없었다. 즉, 목민심서에는 근대 이전 다른 문명권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동양사회 목민에 대한 관료사회의 경험치가 총망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나의 처지가 비천하여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그대로 분류하여 기록하고 소견을 붙였다’는 것이다. 당시 다산이 유배 갔던 호남은 토지의 결수가 전국 8도에게 가장 많은 곳이다. 이는 쌀 생산이 가장 많다는 것이고, 또 이로 인해 아전도 전국 8도에서 가장 간악하게 백성을 수탈하는 곳이기도 하다. 목민심서에서 다산이 말하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이 성현의 말씀이나 논리가 아닌 이렇게 생생한 백성들의 생활을 기반으로 나왔다는 말이다.

목민심서는 이렇게 세 가지 사안을 기반으로 서술돼 있다. ‘사전’의 위 글은 이런 목민심서의 가치를 개인적 경험치로 한정하여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경기암행어사에 대한 기록 역시 목민심서 전체에 두어 차례 등장할 뿐이다. 별도의 항목으로 거론할 만큼 중요한 비중이 아니다.

이어 마지막 문장에 '찰방, 부사 등의 목민관을 지내면서‘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찰방은 목민관이 아니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조에 찰방 역시 외관직으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외관직이 모두 목민관은 아니다. 찰방의 일은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일이다. 목민과는 무관하다. 또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부임한 이유는 당시 금정역이 있던 홍주 땅에 서학을 믿는 이속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효유하는 일이었다. 다산이 한때 서학관련 서적을 탐독한 것이 반대파(노론)의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되어 있어 이를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 방어를 위한 정조의 배려였지 목민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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