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최근 걸 크러시와 중국을 키워드로 한 논문 한 편을 읽었다(‘중국에서의 K-팝 여성 아이돌 그룹의 걸 크러시(Girl Crush) 현상에 대한 연구’, 왕빙기, 2022. 2) 이 논문을 읽으며 중국 시장에서 걸 크러시 콘셉트가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나아가 몇 년 전부터 여성 아이돌 산업의 메인스트림이 된 ‘걸 크러시’가 이 산업에 무엇을 주었는지 상상해 볼 착안점을 얻었다.

걸 크러시는 흔히 강하고 멋진 여성상을 표현하는 스타일적 요소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은 좀 더 넓은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걸 크러시의 어원적 정의는 여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호감이다. 현실에서 문화 수용 양상이 책에 쓰인 몇 줄의 설명대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여성 아이돌 산업이 여성향 산업으로 이행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배경을 짚어 보면 걸 크러시란 콘셉트가 먼저 주어지며 여성 소비자들이 수동적으로 소비하게 된 것은 아니다. 사회문화 전반에서 여성 주체들의 젠더적 각성이 일어나고 그들의 취향과 관점을 반영하는 문화 콘텐츠에 대한 요구가 떠오른 것이 먼저다. 즉, 여성 소비자들의 수요가 반영되고, 그에 조응하여 세상과 자신을 말하고 응시하는 여성의 주체성을 담고 있는 콘텐츠라면 스타일적 요소와 관계없이 걸 크러시로 파악할 수 있다. 블랙핑크·아이들·에스파·엔믹스·르세라핌처럼 강한 박자감과 카리스마를 강조하며 전형적 스타일을 변주하는 그룹뿐 아니라, 레드벨벳·아이브·뉴진스처럼 부드러운 색채감을 띤 그룹 역시 걸 크러시라 해도 틀리지 않다.

걸그룹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여자)아이들 [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엔믹스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연합뉴스)
걸그룹 블랙핑크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여자)아이들 [큐브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파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엔믹스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연합뉴스)

중국 시장은 이런 젠더적 측면에서 한국 시장과 강한 상동성이 있고 여타 해외 시장과 차별화된다. 중국은 남성 아이돌 팬덤이 주류인 일반적 시장과 달리, 여성 아이돌 팬덤이 활발하게 형성되어 있다. 계속 성장하는 현지 앨범 공동구매도 여성 아이돌 앨범 구매량이 남성 아이돌만큼 많다. 같은 인접 국가인 일본과 거울처럼 마주보는 부분인데, 일본에서 선호되는 여성 아이돌이 예쁘고 귀여운 보수적 여성상에 가깝다면, 중국에서 선호되는 콘셉트는 단연 걸 크러시다. 이는 현지에서 ‘여성 경제’라 불리는 여성 소비자 시장의 존재, 현지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에 따라 여성이 다양한 산업의 소비자로 부상하고 특히 엔터 산업에서 팬덤을 구성하는 주역이 된 현상에 의한 것이다.

중국에선 2005년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 여성 목소리>에서 우승한 이우춘이 신드롬을 일으킨 후 ‘중성풍’ 스타일, “이미지의 외형이 이성의 특성을 가지면서도 자신의 성별 특성을 유지”하는 성별 구분을 횡단하는 스타일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한편 앞서 말한 논문의 연구 참가자 중 한 명은 중국에서 최근 몇 년 간 페미니즘에 관한 토론이 열렬하다고 전하며, 걸 크러시 스타일에 대한 선호가 젠더적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현지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 제한된 입장에서 저 참가자의 평가가 얼마나 정확한지 알기는 힘들다. 다만, 중국에서 최근 3년 동안 미투 운동이 진행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중국 페미니즘 활동가 뤼핀은 ‘플랫폼 C’에 번역된 ‘우이판을 무너뜨린 것은 변화된 여성들이다’란 글에서 케이팝 남성 아이돌 그룹 엑소의 전 멤버 우이판이 성폭력으로 구속된 사건을 미투 운동으로 축적된 현지 여성들의 역량이 이루어 낸 개가라고 평가한다.

국내 기획사들이 걸 크러시를 메인스트림으로 받아들이게 된 건 여성 소비자들의 요구나 그 스타일에 잠재된 젠더적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걸 크러시가 서구의 사회상과 문화산업을 통해 이미 표준화된 글로벌 스타일에 부합한다는 이유를 빼놓을 수 없다. 걸 크러시는 케이팝 세계화가 가속하는 단계에서 여성 아이돌들이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양식으로 채택되었고, 여성향 산업으로 전환된 국내시장 수요에도 부합하는 양면의 친화성을 지닌다. 이 구도에서 한국 사회와 케이팝이 서구 사회와 할리우드/그래미에 구조화된 페미니즘과 젠더적 경향을 따라가는 입장이라면, 일본 시장은 그런 흐름과 일정 부분 동떨어진 시장이고, 중국 시장은 케이팝을 통해 케이팝이 서구에서 수혈한 진취적 여성상을 다시 수혈하는 성격이 있다. 이는 중국 사회 자체가 페미니즘에 대해 최근 한국 사회가 걸어온 족적과 비슷한 보폭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통한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 미투 운동의 상징으로 불리는 저우샤오쉬안은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엔번방 사건이 중국 여성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한 바 있다.

걸그룹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레드벨벳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뉴진스(NewJeans) [어도어 제공], 아이브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연합뉴스)
걸그룹 르세라핌 [쏘스뮤직 제공], 레드벨벳 [SM엔터테인먼트 제공], 뉴진스(NewJeans) [어도어 제공], 아이브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연합뉴스)

중국 시장은 특유의 공구 문화와 개인 팬덤 성향이 회자되며 음판 매출을 맡겨 놓은 지역처럼 취급되거나 중국 팬덤은 ‘악개’(악성 개인 팬)이라고 타성적으로 폄하되곤 한다. 하지만, 중국 케이팝 시장은 여성 아이돌에 대한 수요가 높은 여성향 시장으로서 그 바탕에 깔린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국내 여성 아이돌 시장과 가장 유사한 지형을 가진다. 차이가 있다면, 국내 여성 케이팝 소비자가 남성 아이돌 팬덤인 채 여성 아이돌 팬덤도 두루 겸하는 속칭 ‘간잽’ 성향이 있다면 중국 팬덤은 코어 팬덤 성향이 강하단 점이다. 즉, 중국 공구 시장은 국내 음판 시장 규모를 보완해 주는 것을 넘어, 국내 여성 아이돌 여초 시장과 같은 코드를 소비하면서 그들의 제한적 구매력과 코어 팬덤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건 역시 남성 아이돌 팬덤이 주류라 여성 아이돌이 코어 팬덤을 얻는 데 진입 장벽이 있는 여타 해외 시장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걸 크러시는 걸그룹 산업의 세계화를 촉진한 한편, 특정 로컬 시장과의 구체적 연동을 통해 여성 소비자들의 욕구와 취향을 반영한 콘텐츠가 공급되도록 힘을 더해 주고 있다. 그것은 산업적 네트워크를 통한 여성들 간의 보이지 않는 국제적 이어짐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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