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영국 언론 BBC가 걸그룹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의 열애설에 관해 기사를 발행했다. ‘케이팝 스타 카리나 연애 공개 후 사과하다’(K-pop star Karina apologises after relationship goes public)이다. 아이돌이 연애를 했다는 이유로 사과를 하는, 케이팝 산업의 반인권적이고 억압적인 속성을 꼬집었다. 틀린 지적이 아니다. 케이팝은 팬덤 세일즈에 매출을 의존하는 산업이며, 그 팬덤은 아이돌을 향한 애착감정 및 관계성의 환상과 집착을 통해 구성된다. 케이팝은 원래 그런 산업이었다. 아이돌은 인형이 아니라거나 팬들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일갈하는 건 너무나 새삼스러워서 시사점이 전혀 없는 발화다.

BBC, '카리나 사과문' 조명…
BBC, '카리나 사과문' 조명…"K팝 산업, 압박으로 악명" (연합뉴스TV 보도화면 갈무리)

케이팝 산업의 속살을 더듬어 살펴보면 팬덤과 아이돌의 관계성은 계속해서 세부 맥락이 변화했고 윤리적으로 객관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며 아이돌의 연애는 꾸준히 사례가 누적되었고 케이팝 산업에서 일상적 변수가 됐다. 한때는 인기 남자 아이돌과 열애설이 뜬 여자 아이돌에게 협박 편지가 쇄도했지만, 이제는 BTS와 블랙핑크 같은 최고 인기 아이돌이 사실상 공개적으로 연애를 하기도 했다. 케이팝이 글로벌 산업이 되면서 유명인의 프라이버시 개념에 리버럴한 해외 팬들과 언론의 목소리가 이 산업이 좀 더 진보하도록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팬들은 여전히 뜨거운 눈빛으로 아이돌을 응시하지만, 아이돌과 자신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선’이 그어져 있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실 카리나의 열애설은 전례에 비춰 이례적인 부분이 많다. 탑 아이돌의 열애설은 수차례 폭로되었지만, 지금처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거나 후폭풍이 길게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한편, 현 상황에 비춰 특이하게도 에스파, 나아가 카리나의 국내 팬덤은 여초 팬덤이다(물론 해외도 그럴 것 같다). 걸그룹 산업 자체가 여성 팬덤 중심으로 재구성되었지만, 에스파는 그중에서도 여성 팬이 많은 그룹이다. 즉, 전통적으로 열애설이 논란이 되는 이성 관계의 팬덤-아이돌 구도가 아니라 동성 간의 관계 구도인데도 더 크게 파장이 일어난 것이다. 케이팝이 팬덤 산업으로 고도화되면서 팬덤과 아이돌의 관계성은 과거에 비해 좀 더 복잡 미묘해졌다.

"악명 높은 K팝, 스타는 연애 못 해"... 카리나 사과에 외신도 주목 [YTN 앵커리포트]

같은 여성을 향한 선망과 동일시든, 다른 종류의 내밀한 애정이든 간에, 아이돌과의 독점적 관계에 대한 욕구는 성별 관계를 넘나들며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이 상호 동반자적 관계의 지반을 구축한다. 걸그룹이 대중성을 추구하던 시기, 남성 대중으로부터 넓고 얕은 선호도를 누리던 이전 세대에는 열애설이 하나의 이슈 차원에서 파장을 불렀다. 어떻게든 버티고 넘어가거나 사람들의 관심이 흐려지길 기다릴 수도 있는 가십이었다. 지금 세대 아이돌의 열애설은 실질적으로 매출을 이뤄주는 코어 팬덤의 이탈을 부를 수 있고 기획사의 사업적 기반까지 훼손하는 타격이다. 에스파는 데뷔 4년 차라 아직 그 기반을 형성하는 단계에 있는 SM 엔터의 대표 걸그룹이다. 열애설과 함께 SM은 주가 하락을 얻어맞으며 하루 만에 시가 총액 600억이 넘게 빠졌다고 한다. 경쟁자가 낙오되길 기다리는 과포화된 걸그룹 시장은 가십의 파급 효과를 일으켰다.

카리나가 쓴 자필 사과문은 SM 엔터의 의도나 컨펌 없이는 나올 수가 없는 글이다. 사과문으로 인해 외부 여론의 동정을 얻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실상을 짚어보면 카리나의 팬들이 사과를 해야 할 만큼 비난했다고 할 수는 없다. 연애를 규탄하는 문구를 전광판에 쓴 트럭이 SM 사옥에 두 차례 방문했지만, 그런 걸 보낼 만한 팬덤 내부의 유명 인사나 대표 집단에서 모금이나 관련 움직임은 없었다. 과연 팬덤의 일원이 보낸 것이 맞는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고, 보낸 것이 사실이라도 팬덤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열애설이 뜬 직후부터 SNS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팬덤의 핵심 정서는 분노가 아니라 충격과 허탈함이었다. 카리나 글로벌 팬 연합과 글로벌 팬덤의 핵심 중국 팬덤은 카리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카리나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속사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그룹 에스파의 카리나/ SM엔터테인먼트 로고 이미지 (연합뉴스)
그룹 에스파의 카리나/ SM엔터테인먼트 로고 이미지 (연합뉴스)

사업적 측면에서 SM이 우선시했어야 하는 건 저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따로 말을 거는 것이었다. 사과문은 과연 써야만 하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었는지 의문과 아쉬움이 든다. 케이팝의 ‘인권적’ 관점에서도 그렇다. 이런 방식의 대응은 그 자체로 산업의 전례가 된다. 아이돌의 연애를, 사과를 해야 하는 일과 그럴 이유가 없는 일 중에서 전자로 만든 건 사과문 업로드를 컨펌한 SM 엔터 자신들이다. 지금껏 연애가 공개된 많은 아이돌들이 사과문까지 쓴 경우는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봐도 그렇다. 주가 하락에 다급해 어리석은 방식으로 대처하고선 케이팝을 억압적 산업으로 만드는 책임이 팬들에게 있는 것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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