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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걸그룹 ‘에스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광야로[culture critic] SM엔터테인먼트의 아바타 아이돌은 성공할 수 있을까
윤광은 | 승인 2020.11.24 12:54

[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일 년 전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이런 말을 했다. 2019년 2월 21일 '한국-인도네시아 콘텐츠 및 IT 협력 세미나'에서 한 기조연설이다. 국가 간 협력을 통한 문화산업 미래 전략을 논하면서 "미래에는 셀러브리티와 관계된 비즈니스가 더욱 중요해지는 세상", "내가 좋아하는 셀러브리티의 아바타와 하루를 시작하고 일상을 보내는 세상이 올 것"이라며 "아바타들의 초거대 버추얼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 주장했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를 너무 일찍 그리는 것 같았다.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세계문화산업포럼 연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하지만 먼 미래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예언은 불과 1년 후 실행되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이달 11월 17일 걸그룹 에스파를 데뷔시키며 데뷔곡 'Black Mamba'를 발표했다. 최근 대세가 된 걸 크러시 계열의 춤과 노래를 보여주는 4인조 걸그룹이지만 콘셉트가 독특하다. 멤버 개개인과 매칭되는 그래픽 아바타 캐릭터를 제작하고 활동을 병행시킨다. 멤버 자신들의 '또 다른 자아 아바타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세계관이다.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가 병존하고 실존 멤버들과 아바타 멤버들은 두 세계의 중간계 '디지털 세계'에서 만난다. 이 세계관을 이루는 갖가지 디테일들이 히어로 영화 시놉시스처럼 부연돼 있다. 이상의 콘셉트와 에스파라는 그룹은 SM 소속 아티스트를 아우르는 "거대 세계관을 통한 가상 국가" 'SM 컬처 유니버스'에 속한다. 아바타를 활용한 사업 방식, 가상계와 현실계, 디지털계로 구성된 세계관이 에스파에 머물지 않을 것이 짐작된다. NC 소프트에서 내년 2월 여러 기획사 아이돌을 대상으로 론칭할 예정인 아이돌 팬 서비스 앱 ‘유니버스’ 역시 AI 기술 활용과 통합적 세계관이 암시된 점에서 SM이 주창하는 비전과 통한다. 에스파는 꽤나 급진적인 설정을 갖고 있지만, 조금씩 흘러오고 있는 물결의 선두에서 오는 기획인 셈이다.

이런 기획은 스마트폰과 콘텐츠 지적 재산권이 일상화되어 셀러브리티와 소비자의 거리감이 옅어지고 콘텐츠 포맷이 확장되는 시대 환경 속에 '4차 산업혁명'이란 테마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흔히들 인공지능과 무인시스템으로 회자하는 그것 말이다. 수익성 있는 모델로 현실화되기만 한다면 물론 장점이 많다. 실존하는 아티스트의 활동을 관리하는 데 드는 제반 비용과 물리적·지리적 제약을 초월할 수 있다. 흡사 애니메이션과 게임 캐릭터를 활용하듯 콘텐츠와 부가 상품을 다각화하고 굿즈와 피규어 등의 형태로 아티스트를 재현하기도 쉽다. 불현듯 닥쳐온 팬데믹 시대, 국가 간 이동과 오프라인 행사가 제한된 시대를 돌파할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서의 장점도 있겠지만, 이미 케이팝 산업에 팬데믹을 우회하는 온라인 수익 모델이 정착한 상황이라 이 지점에서 아바타 아이돌의 경쟁력이 얼마나 클지는 잘 모르겠다.

SM엔터테인먼트 신인 걸그룹 '에스파' 멤버들과 아바타들 [SM엔터테인먼트 제공]

에스파를 접하며 든 첫인상은 저 모든 설정과 기획이 너무 단번에, 복잡한 형태로 제시되었다는 느낌이다. 실존 아이돌과 아바타 아이돌을 함께 데뷔시키고 세계를 3가지 존재태로 구분 짓는 세계관은 디테일이 갖춰진 만큼 디테일해서 어렵다는 느낌이 들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이돌 팬덤 산업의 핵심은 아이돌과 팬들의 애착 감정, 유대감이다. 이미 매체들을 통해 지적되었듯 아바타를 통해 정서적 친밀감을 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막 데뷔하는 그룹이라 팬들을 유입시켜야 하는데,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몰입하기엔 기획 자체가 진입 장벽이 되는 셈이다.

요즘은 아이돌의 서사와 세계관이 중요하게 소비되는 시대다. 굳이 비교 대상으로 이름을 열거하지 않아도, 자신들의 세계관과 이야기를 자아내며 성공한 그룹들이 있다. 팬덤이 크고 단단한 아이돌은 대부분 갖추고 있는 속성이라고 봐도 된다. 하지만 역시 그 대부분은 처음부터 완성된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팬들의 콘텐츠 해석과 피드백, 2차 창작 속에 멤버들의 캐릭터, 관계성이 발굴되거나 덧붙여졌고, 팬들의 서포트 속에 더 큰 그룹으로 발돋움하는 성장서사가 쓰였다. 아이돌이 품은 서사적 요소는 기획사의 설정 제시를 넘어 현실에서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여정, 팬덤 기층과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 등 '아래로부터의 기획'이 반영될 때 몰입감과 파급력을 얻는다. SM 컬처 유니버스와 에스파의 세계관은 이것의 역순으로 내려오는 '위에서 주입되는 기획'이다. 팬들이 채워 나갈 수 있는 세계관의 여백을 충분히 비워주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에스파의 콘셉트는 독특하지만, 세부를 살펴보면 익숙한 것들이 조합돼 있다. SM 컬처 유니버스는 최근 문화산업 각 분야에서 개별 콘텐츠를 연결하기 위해 참조되는 마블 유니버스를 연상케 한다. 케이팝 산업과 가상 캐릭터의 만남은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 캐릭터들로 구성된 가상 걸그룹 'K/DA'가 선행 사례다. 더 직관적인 예시를 들자면, 가상 캐릭터로 연출된 아이돌 서사로 파생 상품을 출시하고 오프라인 콘서트까지 거행하며 수익 모델을 현실화한 사례는 일본 애니메이션 '러브라이브'가 있다. 에스파는 저 요소들을 케이팝 산업에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융합시킨 격이랄까.

걸그룹 에스파 콘셉트 사진 [SM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 아이돌 시장은 레드오션이 된 지 오래다. 아이돌 산업의 서브컬처화는 팬덤 시장이 메인 시장인 보이그룹보다 대중 시장이 메인이던 걸그룹에게 더 강하게 가닿았다. 이 여파 속에 다인조 모델의 팬덤형 걸그룹이 등장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눠 먹을 수 있는 팬덤 파이는 한정돼 있다. 걸그룹은 팬덤 사업의 투자 대비 수익성이 보이그룹에 비해 훨씬 적다. 이제 대형 기획사들은 걸그룹의 경우 매니지먼트 비용이 적게 드는 소규모 인원으로 론칭하고, 국내 팬덤 시장 대신 최근 더욱 확장된 해외 시장을 노리는 것도 같다. 이들은 팬덤 세일즈에 특화된 음반 프로모션보다 음원과 뮤직비디오 프로모션에 중점을 두고 퍼포먼스와 콘셉트에 치중한 매력을 보여준다. 국내에선 인지도를 넓게 형성하는 정도로 활동하고, 해외에서 팬덤을 불려 일정한 수익과 글로벌 그룹의 명성을 얻는다. 대형기획사 걸그룹의 역할이 ‘K 컬처’ 세계화 시대에 소속사 브랜드가치를 꾸며주는 상징 자본으로 정리되고 있달까? 이 모델의 선발 주자가 2016년 데뷔한 YG 엔터테인먼트의 블랙핑크였고, 2019년 데뷔한 JYP 엔터테인먼트의 ITZY 역시 일정 부분 비슷한 양태로 활동한다. 그리고 에스파는 해외 시장 확장에 더해, 가상 세계의 '광야'로 사업 확장을 시도하는 SM 엔터테인먼트의 첨병이 되었다.

SM 엔터테인먼트는 지난 몇년 간의 산업 흐름을 주도하지 못했다. 진보적인 음악 프로듀싱과 세련된 미장센의 뮤직비디오는 정평이 나 있지만, 사회관계망 서비스 시대가 온 후의 흐름에선 정체돼 있었다. 최근 케이팝의 헤게모니를 상징하는 북미 시장에선 빅히트와 YG가 치고 나갔다. SNS와 자체 제작 콘텐츠를 통한 팬덤과의 쌍방향 소통, 오프라인 대면 이벤트 등 팬덤을 양성하고 관리하는 운영 또한 활발하지 않았다. SM 소속 그룹 팬들은 이 점을 아쉬움으로 지적해 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SM 아이돌보다 큰 팬덤을 가진 보이그룹과 걸그룹은 이미 여럿 나타났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입각해 첨단 트렌드를 주창하는 것은 좋지만, 아이돌 산업의 본질, 팬덤을 규합하는 요령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실속이 클 순 없다.

만약 “아바타들의 초거대 버추얼 세상”이 이미 도래한 사회라면 “내가 좋아하는 셀러브리티의 아바타와 하루를 시작하고 일상을 보내는” 산업은 당연히 뒤따라올 것이며 대안적 사업 모델로 정착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세상이 언제쯤 찾아올지 막연하게 느껴지는 사회라면 아바타 아이돌이 사회상의 변화를 이끌며 성공할 수 있을까? 20여 년 전, IT 산업의 부흥과 밀레니엄 시대의 흥분 속에 탄생한 사이버 가수 아담이 생각난다.

윤광은  https://brunch.co.kr/@mcwanna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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