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영광 객원기자] 2021년 2월 1일 미얀마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미얀마 군부는 2020년 11월 이루어진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며 정국을 안정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정권을 잡은 후 반군부 인사들을 유혈 탄압했다. 그리고 미얀마 시민들이 군부 쿠데타에 반발해 항쟁을 시작한 지 1년이 지났다. 지금 미얀마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4일 MBC <다큐플렉스> ‘쿠데타 1년,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이 방송되었다. 슈퍼주니어 규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 이날 방송은 미얀마 현지 기자들이 찍은 영상으로 지난 1년을 정리했다. <다큐플렉스> 제작 이야기가 궁금해 ‘쿠데타 1년,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을 연출한 김영미 PD와 지난 7일 전화 연결했다. 다음은 김 PD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MBC 다큐플렉스 ‘쿠데타 1년,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

4일 ‘쿠데타 1년,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 방송 끝낸 소회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이 프로젝트는 1년 동안 진행된 거예요. 어떻게 보면 억지로 만든 프로그램이기도 합니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려다 보니 순탄하지 않았죠. 방송 후 그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여곡절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더라고요. 그래도 안 한 것보다는 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일단은 기록을 남길 수 있어서입니다. 광주 때도 만약 그 기록이 없었다면, 증거가 없으니 소문으로 지나갔을 일들도 있잖아요. 그만큼 기록이 중요한데 미얀마에도 차후에 민주화가 왔을 때, 광주처럼 그 기록을 증거로 독재정권의 범죄나 진상규명을 할 수 있을 테니 제작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미얀마 쿠데타 후 1년’을 담은 다큐에서 청년에 주목한 이유가 있을까요?

“청년들은 ‘미래’와 같은 뜻이잖아요. 청년들이 꿈을 버리고 아파한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은, 그 나라에서 누가 어떻게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거든요. 또 방송에 등장하는 미얀마 청년들은 우리 청년들하고 하나 다를 바 없는 청년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감대를 가지면서 미얀마 문제에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기를 바랐던 거예요. 사실 개인적으로 이만한 청년이 있는 엄마거든요. 그래서 더욱 미얀마 청년들에게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어요.”

분쟁지역 전문 독립PD 김영미

내레이션을 슈퍼주니어의 규현 씨가 했는데, 섭외 이야기가 있을까요?

“규현 씨와 녹화도 한 적 있는데 사회적이거나 국제적인 문제에 관심도 있고 스마트하더라고요. 그래서 미얀마 다큐에 이분이 내레이션을 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해서 부탁을 했는데 흔쾌히 OK 했어요. 문제는 내레이션 녹음하기 한 열흘 전에 규현 씨가 코로나에 걸린 거예요.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도 있지만, 규현 씨의 따뜻한 마음에 꼭 하겠다는 본인 의지도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녹음을 했습니다.”

미얀마 기자들이 찍어 보내온 분량이 얼마나 되나요?

“이분들이 그전에 다큐멘터리 촬영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처음에 영상 촬영을 의뢰하고 콘티를 잘 써서 보내도 인터뷰 하나만 달랑 오는 거예요. 현장 스케치 커트도 없고, 풀샷도 없고, 이미지 샷도 없으니 황당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통하며 다큐멘터리 만들려면 이런 커트도 필요하고 저런 커트도 필요하다는 설명을 했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장면에 풍부한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은 거예요. 영상이 조각조각이라 이걸 어떻게든 편집으로 붙여서 살려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 다큐멘터리에도 한 80% 이상은 미얀마 그림으로 채웠잖아요. 사실 더 많은데 한국 장면도 필요해서 그 정도로 편집을 한 것입니다.”

방송용으로 쓰기 어려운 촬영분이 많았는데 어떻게 살렸을까요?

“구성부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현지의 목소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과 미얀마에서 서로 줌 미팅도 하고, 한 번 촬영했더라도 여러 번 가서 더 필요한 영상을 촬영했습니다. 촬영팀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한 번 갔던 곳에 카메라 들고 다시 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능한 집안에서 촬영하고 누군가 망을 봐주면 들키지 않게 촬영할 수 있으니까 복잡하더라도 촬영 전에 철저히 세팅을 하죠.”

MBC 다큐플렉스 ‘쿠데타 1년,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

미얀마 시민들이 하는 세 손가락 시위는 우리로 생각하면 촛불과 같을까요?

“맞아요. 세 손가락 경례는 원래는 태국 시민운동 중에 나왔던 겁니다. ‘나는 군부를 반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들만의 암묵적인 룰인 거죠. 법으로 지정된 것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지만, 쿠데타 초기부터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그 세 손가락 경례를 했습니다. 우리의 촛불과 같은 의미라고 저는 생각해요.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 처음부터 총을 들고 싸우는 건 아니었거든요. 이 세 손가락으로 군부의 총탄과 맞섰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희생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총을 들고 숲으로 들어간 청년들이 시민군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을 PDF군(시민방위군)이라고 부르는데 PDF군이 되기까지 그들이 들었던 세 손가락이 정말 여러 번이었겠죠. 민간인이 할 수 있는 최대 저항의 표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얀마 청년들이 영화 <택시운전사>를 많이 본다고 나옵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다룬 작품이 많은데 유독 <택시운전사>를 많이 보는 이유가 뭘까요?

“미얀마 사람들은 <1987>, <화려한 휴가> 등의 한국 영화도 많이 봐요. 그런데 <택시운전사>가 유독 국민적 공감을 받은 이유는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부 탄압과 쿠데타 소식이 외부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커서라고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다른 한국 영화에는 과거의 아픈 이야기들만 있지만 <택시운전사>는 외국인이 와서 한국의 광주 상황을 외국으로 알린다는 내용이 있잖아요. 그 부분이 미얀마 국민들한테는 크게 와 닿았던 것 같아요.”

다큐에 80년 5월의 광주 이야기도 담으셨는데, 80년 광주와 2021년 미얀마의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을 거 같아요.

“미얀마 국민들도 광주 민주화운동은 다 알고 있어요.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난 지 벌써 1년이 됐잖아요. 광주는 10일 만에 무력 진압이 되고 끝났죠. 우리 광주는 우리 힘도 물론 있었지만, 해외에서도 관심도 있었거든요. 광주 항쟁이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민주화운동으로 기억되듯 미얀마도 앞으로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미얀마가 그때 광주랑 다를 수도 있겠다고 느낀 것은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단 점입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릴까요?

“제가 방송에도 넣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미얀마 상황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유엔도 쉽게 움직이지 않고 있잖아요. 미얀마의 비극이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국제사회는 왜 미얀마를 방치하는 거죠?

“미얀마가 우리한테는 그래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나라이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너무나 먼 나라인 거예요. 미얀마 쿠데타 발발 당시 서구 사회에서는 벨라루스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나 항쟁이 더 주목받았어요. 미얀마에 대해서는 서구 사회가 잘 모르기 때문에 관심 갖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졌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미얀마의 일들은 계속 묻히게 되는 거예요.”

MBC 다큐플렉스 ‘쿠데타 1년,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

미얀마 군부가 청년들 잡아가 고문한다고도 하는데 강도가 심한가 봅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고문은 굉장히 큰 아픔으로 남아 있지만, 미얀마도 심한 것 같아요. 우리 민주화운동이나 학생운동 하시던 분들은 사상도 있고 공부도 해서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었던 반면, 미얀마 청년들은 너무 평범하게 있다가 갑자기 잡혀간 거예요. 아무런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민간인을 고문한 거죠.

청년들이 정신적 충격에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많고, 무사하게 풀려났어도 정신적 트라우마가 너무 커요. 고문당했던 기억을 평생 갖고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청년들은 고문당하고 난 뒤에 풀려났어도 계속 고문을 당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요. 더군다나 그쪽 고문은 더 악독한 것 같아요. 제가 고문 기술자를 인터뷰했는데, 그 사람이 구사하는 끔찍한 고문법이 너무 많았어요. 자신이 끌려온 청년들을 어떻게 고문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걸 듣고 무서웠어요. 방송에 차마 그 인터뷰까지는 내보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하게 그렇게 고문을 하더라고요.”

어느 정도인가요?

“성고문도 굉장히 많고 물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요. 고문한 다음에 청년들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때려요. 최대한 엉망이 된 청년들의 얼굴을 저녁 뉴스에 메인으로 내보내요. 그래서 그걸로 다른 청년들에게 겁을 주죠. 이를 보고 저항의 의지를 꺾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얼굴이 예쁜 여성이나 잘생긴 얼굴일수록 얼굴을 더 많이 집중적으로 때린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인터뷰한 고문 기술자는 젊은 여성들 중 자기가 때렸는데 턱이 완전히 박살 났다고 자랑하더라고요. 여성들은 얼굴이 작아서 조금만 패도 턱과 이가 다 부러지더라고 얘기했어요.”

쿠데타 1년이 지난 지금 미얀마는 어떤가요?

“지금 미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멈추지 않고 있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고문하는데도 시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저항하고 있습니다. 또 청년들은 국제사회에 대한 실망이 많습니다. ‘국제사회가 이제는 도와주지 않는다. 도와주러 오지 않을 거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그래서 시민군에 합류하는 청년들이 많아졌습니다. 또 시민군에 합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기부금을 많이 보내서 어떻게든지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 1년이 지났지만, 미얀마는 아직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제가 1년 동안 미얀마 상황을 취재한 결론입니다.”

MBC 다큐플렉스 ‘쿠데타 1년, 미얀마 청년들의 꿈' 편

다큐 제작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작년에 미얀마에서 다큐 제작을 시작하고 한 반년쯤 됐을 때 ‘내가 미친 짓 한 거 아닌가.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려다 이렇게 난리가 나지’란 생각을 했어요. 취재 중에 별별 일이 다 생기다 보니 그런 후회도 좀 했어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최대한 알 권리를 보장하는 거거든요. 제가 직접 들어갈 수가 없는 형편이면, 거기는 현지 기자라도 취재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큐 제작을 했던 기자들은 제가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기자들이에요. 줌 미팅에도 미얀마 몽유와 쪽에 있는 기자들은 어차피 수배당한 사람들이라 저에게 얼굴을 알려줬지만, 다른 지역 기자들은 전혀 얼굴을 몰라요. 이 뒤죽박죽된 상황 속에서 그래도 소식 하나라도 더 나올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저의 의무가 아닐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의무를 지키는 것이 제일 힘들었어요,

두 번째로 제작비 문제가 힘들었어요. 제가 미얀마 기자들을 고용하고 매달 월급과 취재 비용, 취재 장비 비용을 보냈어요. 이 모든 제작비가 어마어마하게 들었는데 저는 개인 후원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친한 지인들이 조금 도와주긴 했어요. 공개 후원금을 받지 않고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것이 저는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얀마 사람들이 많이 도와준 덕분이죠. 민주화를 위해 본인들의 몫을 어떻게든 감당하려고 노력했던 마음,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끝까지 방송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생각하죠. 물론 시청자 입장에선 그냥 한 시간 방송 프로그램으로 끝나셨겠지만, 미얀마 기자들과 저희 회사 그리고 굉장히 많은 미얀마 사람들이 1년을 갈아 넣은 거거든요.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혼자 만드는 게 절대 아니라는 걸 더 뼈저리게 느꼈어요. 많은 미얀마 사람들과 한국분들이 도와주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비록 개인 후원금을 받지 못해서 제가 제작비 때문에 너무나 많은 고생을 했고 지금도 빚이 엄청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한 나라 역사의 한순간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나라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서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저에겐 가장 큰 수확이자 보람입니다.”

혹시 방송에 담지 못했지만 소개할 장면이 있을까요?

“판다라고 불리는 몽유와의 저항 지도자 웨이 모 나잉이 잡혀갔을 때입니다. 체포 전에 저와 소통을 했는데 본인이 체포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준비하고 있다며 소개한 청년이 방송에 나온 깐 웨이 표에요. 그는 체포된 웨이 모 나잉의 뒤를 이어 몽유와 지역의 저항 세력 지도자로 나섰습니다.

이 두 청년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어요. 칸 웨이 표는 대학원 마지막 석사 논문을 앞두고 있었고, 웨이 모 나잉은 사업구상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직전이었다고 해요. 이렇게 미래가 밝았던, 꿈많은 두 청년이 쿠데타로 고향 몽유와에서 저항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우정이 어마어마하거든요. 그런 것도 저는 다큐멘터리에 담고 싶었는데 촬영 분량의 한계도 있었고 또 방송 시간에도 한계가 있었어요. 그걸 미처 편집하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미얀마를 위해 우리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미얀마 뉴스에 계속 관심 기울여주시고 또 미얀마 시민들을 위한 기부도 멈추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미얀마 청년들이 미얀마의 미래이자 우리 아이들의 미래의 파트너라는 생각을 가져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여론이 되고, 그 여론이 정부를 움직일 거고 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각자가 자그마한 관심의 촛불을 들어주시면 그 촛불이 혁명으로 이어지고, 또 역사의 한순간으로 남을 거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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