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권오석 칼럼] “헌법을 지키겠다”는 구호는 한국 정치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다. 국회 상임위, 예산 국면, 선거철, 심지어 당내 분쟁이 벌어질 때마다 정치인들은 헌법을 들고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은 과연 현실에서 진실한 무게를 갖고 있는가. 헌법이 명령하는 ‘국민의 행복’은 어디에서 실현되고 있는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지방정치의 현실은 이 물음에 냉정한 답을 요구한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이 조항은 단순한 철학적 문구가 아니라, 국가 운영의 최고 원리이며 모든 행정·입법·사법이 따라야 할 기준점이다. 그러나 정작 정치 현장에서 이 권리는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가.

지방선거 (PG) (연합뉴스)
지방선거 (PG) (연합뉴스)

오늘 대한민국 지방정치는 정당 중심의 과열된 경쟁 속에서 주민의 삶보다 조직의 이익을 앞세우는 구조로 변질되고 있다. 일부 지방 시·군에서는 정당 당원 수가 실제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수준까지 치솟으며 ‘당원 확보 경쟁’이 일종의 권력 재편 게임처럼 진행된다. 원래 당원제도는 시민의 자발적 정치 참여를 위한 장치였으나, 지금은 오히려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숫자 경쟁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지방행정은 왜곡된다. 행정의 목표는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서 벗어나, 다음 선거를 위한 선심성 예산집행과 조직 관리로 기울어진다. 도로포장, 축제예산, 민원성 사업은 늘어나고, 지역 미래를 위한 인재육성·산업정책·디지털·AI 인프라 구축 같은 장기 사업은 뒤로 밀린다. 지역정부가 공익이 아닌 ‘정치적 생존’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행정조직의 정치화다. 지방공무원은 헌법 제7조에 따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사와 조직문화가 특정 정파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경우가 많다. 정책 결정이 공익보다 정무적 판단에 따라 좌우되고, 불이익을 우려한 공무원들은 소극행정에 머물기 쉽다. 주민은 행정을 신뢰하지 못하게 되고, 지역사회는 정파적 갈등으로 양분된다.

이것이 과연 ‘헌법 수호’인가? 헌법이 요구하는 것은 단호명백하다. 정치는 국민의 참정권을 존중하고, 행정은 공공성과 중립성을 지키며, 국가는 국민의 행복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인들은 이 기본 명령을 외면한 채, “헌법을 지키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지 않은가.

진정으로 헌법을 지키는 길은 구호에 있지 않다. 제도 개혁과 실천에 있다. 무엇보다 먼저 정치와 행정의 기능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정치인은 방향을 제시하지만, 행정은 중립적으로 집행해야 한다. 지방행정에 대한 정당의 과도한 영향력을 줄이고, 공무원의 인사가 성과와 전문성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예산 역시 정치적 선심이 아니라 주민이 실제 필요로 하는 공공서비스에 우선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제 확대, 성과 기반 예산제 강화, 정책결정 과정의 투명성 확보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행정의 공정성과 예산의 투명성이 확보될 때, 비로소 주민은 자신이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다고 신뢰할 수 있다.

정치개혁 또한 필요하다. 공천 과정에서의 조직 동원, 금권 선거, 단체의 집단당원 가입 같은 왜곡된 행태를 과감하게 차단해야 한다. 주민이 참여하는 공개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와 공천심사의 정량화는 정치의 책임성과 대표성을 높이는 핵심적 조치가 될 것이다. 정당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위해 스스로를 개혁해야 한다.

언론과 시민사회 역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지방정치의 문제는 중앙정치보다 더 폐쇄적이고 드러나기 어렵다. 지역언론의 자립 기반을 강화하고, 시민이 정책·예산 정보를 쉽게 감시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제 “헌법을 지키겠다”는 말은 더 이상 미사여구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헌법을 지킨다는 것은 국민의 존엄과 행복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제도를 만들고, 이를 실행하는 것이다. 지방정치를 사익과 조직 경쟁에서 해방시키고, 행정을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독립시키며, 주민의 삶을 중심에 두는 것이 진짜 헌법 수호다.

정치인은 말이 아니라 구조로 증명해야 한다. 정책과 제도, 그리고 공직자로서의 행동이 헌법을 따르고 있는지 국민은 알고 있다.  헌법을 입에 담기 전에, 헌법이 명령하는 양심을 따르는가?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치인은 헌법을 말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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